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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임지현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이 시간에 서원 씨가 왜 온 걸까? 여기서 육현재와 마주치면 끝장이야...’ 거실 쪽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 소파에 앉아 있던 육현재가 담배를 비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임지현은 급히 아이를 달랜 뒤 침실 문을 닫아 두고 곧장 현관 앞으로 달려 나왔다. 육현재의 손이 문손잡이에 얹혀 있는 것을 본 임지현은 다급히 팔을 뻗어 그의 손을 붙잡았다. “문 열지 말까?” 육현재의 얼굴에는 이 상황을 즐기는 듯한 기색이 스쳤다. 임지현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 뭐가 돌아오는데?” 육현재가 한 발짝 더 다가왔다. 가까워진 거리만큼 위험한 기운도 그대로 밀려왔다. 임지현은 더 생각할 틈도 없이 손을 들어 올려 그의 입을 막았다. “자고 있었어요. 서원 씨, 무슨 일이에요?” 문 너머로 들리게끔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지만 목소리 끝은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이 순간을 들켜버릴까 봐 두려웠다. “보고 싶어서요. 잠깐 얼굴만 보려고 왔어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바닥에 날카로운 통증이 전해졌다.육현재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손을 깨물었다. “윽!” 임지현은 반사적으로 손을 떼었지만 하얀 피부 위에 선명한 이빨 자국이 남아 있었다. “너 개야?” 임지현은 이를 죽이며 낮게 쏘아붙이며 그의 가슴을 한 번 밀쳤다. “지현 씨? 왜 대답이 없어요?” 문밖에서 들려오는 고서원의 목소리가 점점 조급해졌다. “결혼식 전날 밤은 안 만나는 게 예의래요. 오늘은 그냥 돌아가 주세요.” 어떻게든 그를 돌려보내야 했다. 그 순간, 육현재가 입을 열려 하자, 임지현은 더 고민하지 않고 그의 넥타이를 아래로 끌어당겼다. 발뒤꿈치를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육현재조차 순간 굳어버렸다. 문밖에서 고서원이 무언가 더 말했지만, 두 사람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가쁜 호흡이 뒤엉켰고 정신이 아득해질 때쯤 육현재가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읍!”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침실 쪽으로 향했다. “지현 씨, 주무세요? 그러면 오늘은 이만 가겠습니다. 내일... 내일만 지나면 지현 씨는 제 아내가 될 거잖아요. 우리 평생 같이...” 그때, 육현재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임지현의 허리를 감싸안았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이윽고 침실 문이 ‘쾅’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다음 날 아침, 신랑 측에서 함을 들고 호텔에 도착했지만 문은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았다. 호텔 직원의 도움으로 문을 열었을 때, 객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고서원의 손에서 꽃다발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시각, 임지현과 이윤이는 이미 서울 근교의 한적한 별장에 도착해 있었다. 일주일 뒤의 아침.옅은 커튼 사이로 스며든 햇살이 임지현의 희고 매끄러운 피부 위에 내려앉았다. 육현재는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등에 손을 얹고 있었다. 그의 길쭉한 손가락이 그녀의 나비뼈를 절반쯤 가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아직 눈을 감고 있었다.어질러진 옷가지가 바닥에 흩어져 있었고 방 안에는 뜨거웠던 지난밤의 흔적이 미처 가시지 않은 듯 온기가 남아 있었다. 임지현이 먼저 눈을 떴다. 가까이 있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이윤이를 데리고 여기서 나가야 해.’ 육현재는 두 번 다시는 얽히고 싶지 않은 남자였다.무엇보다 아이의 존재를 그에게 들켜서는 안 됐다. 그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도망칠 기회도 함께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3년 전, 그녀가 이혼을 결심한 이유는 분명했다. 육현재가 품고 있던 비밀 때문이었다. 그에게서 사랑을 느낀 적이 없었고, 더욱이 다른 여자의 대체품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고서원의 도움으로 죽은 사람처럼 육현재의 세상에서 사라졌었지만 완벽하게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런데… 육현재는 이미 다른 여자와 결혼하지 않았나?’ 결혼 후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그 여자가 해외로 보내졌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 그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생각이 꼬리를 물수록 호흡이 흐트러졌다.그 미세한 변화를 알아챈 듯, 옆에 있던 육현재가 눈을 떴다. 그는 임지현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팔에 힘을 실어 덩굴처럼 단단히 그녀를 끌어안았다. 임지현은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벗어나려 할수록 그의 힘은 더 단단해졌다. “육현재, 이거 놔.” 그녀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거부감이 실려 있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몸은 익숙해졌을지 몰라도 마음은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또 말 안 듣네?” 육현재의 다른 손이 그녀의 허리를 따라 천천히 올라갔다. 허리라인을 짚고 올라가던 손길은 이내 그녀의 목덜미에 멈췄다. 손끝에는 거부를 허락하지 않는 힘이 실려 있었다. “아직도 그놈 생각해?” 손아귀가 미세하게 조여들자, 임지현의 얼굴에 옅은 홍조가 번졌다. 눈가가 붉어졌고 눈물이 맺혔다. “아파...” 육현재는 그제야 힘을 조금 풀었다. 곧바로 뜨거운 입술이 피부에 닿았고 그녀의 목과 또렷한 쇄골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그때였다.급한 노크 소리가 방 안의 공기를 단번에 깨뜨렸다. 육현재의 손이 마침내 멈췄다. 임지현은 재빨리 몸을 빼 두 걸음 물러섰다. 바닥에 흩어진 옷을 주워 들며 허리를 숙였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움직임만큼은 빨랐다. 그녀는 문밖에 누가 서 있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문을 나서기 직전, 임지현은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봤다.육현재는 침대에 반쯤 기대앉아 있었다. 훤히 드러난 상체에 근육이 또렷했고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러나 시선만큼은 날카로웠다. 한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끝까지 임지현을 따라붙었다. 임지현은 문을 살짝 열고 몸을 틀어 밖으로 빠져나왔다.예상대로 문 앞에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어리둥절하게 쳐다보는 얼굴이 있었다. “이윤아, 왜 이렇게 일찍 깼어?” 임지현은 아이를 품에 안아 올렸다. 말랑한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자, 익숙한 분유 향이 코끝을 스쳤다. 그 향기 하나만으로도 조금 전까지 어지럽던 마음이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이윤이가 없었다면 그동안 어떻게 견뎠을까...’ 이윤이를 가진 사실은 육현재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나서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을 혼자만 품은 채 아이를 낳은 지도 어느새 3년이 흘렀다. 그동안 임지현은 아이 하나만 붙잡고 버텨 왔다. 그러다 고서원이 나타났고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함께하며 굳어 있던 그녀의 마음을 조금씩 풀어 주었다. 고서원은 이윤이를 친자식처럼 대했고 임지현이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안정’을 건네주었다. 그 평온함 때문에 임지현은 처음으로 아이에게 온전한 집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윤이 엄마 보고 싶었어요... 요즘 엄마랑 같이 못 잤잖아요.” 품에 안긴 이윤이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이윤이의 말랑한 입술이 그녀의 뺨에 살짝 닿았다. 말끝에는 아이 특유의 투정 섞인 애원이 묻어있었다. 그런데 그때, 등 뒤에서 문이 거칠게 열렸다. 가죽 구두가 바닥을 차는 소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지더니, 이내 뼈마디가 굵은 큰 손이 그녀의 가느다란 어깨를 거칠게 눌렀다. “임지현은 내 거야.” 육현재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복도를 따라 길게 울렸다. 반박을 허락하지 않는 소유욕이 그대로 느껴졌다. 이윤이는 순간 임지현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작은 얼굴을 그녀의 목덜미에 묻은 채 훌쩍이며 울음을 삼켰고 아무리 달래도 좀처럼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임지현은 몸을 틀어 육현재의 손을 떼어냈다. 가벼운 움직임이었지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나이 먹고 애랑 경쟁하고 싶어?” 임지현은 아이를 안은 채 그대로 계단을 내려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육현재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는 안경을 고쳐 쓰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거실로 따라 내려갔을 때, 임지현은 아이를 안고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이윤이는 그녀의 품에 기대 긴장을 풀고 있었다. 육현재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담담한 어조였지만 이번에도 반박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윤이도 이제 어리지 않아. 가정교사 불렀어. 오늘부터 바이올린 가르칠 거야. 예술은 집중력 키우는 데 도움이 되니, 어릴 때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거야.” 말이 끝나자마자 이윤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육현재를 꼭 닮은 그 눈에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경계심이 드러났다. “싫어요... 저는 바이올린 안 할래요... 엄마랑 같이 있을 거예요...” 아이는 울먹이며 작은 손으로 임지현의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임지현이 몸을 숙여 아이를 달래려는 순간 육현재가 다가와 소파에 앉았다. “이제 두 살이 넘었잖아. 규칙을 배울 나이야. 지나치게 감싸기만 하면 오히려 아이한테 독이 돼.” 육현재는 온화한 말투를 유지한 채, 자애로운 미소를 띠었다. 다만 스치듯 아이의 눈물 젖은 얼굴을 훑는 그 시선에는 다른 의도가 담겨 있었다. 임지현은 멈칫하다가 내밀었던 손을 천천히 거둬들였다. ‘꼬마 녀석이 감히 나랑 경쟁하겠다고? 분유라도 더 먹고 덤벼.’ 육현재의 눈빛에 계산이 스쳤다. “오후에 같이 옷 좀 보러 가자.” 그는 임지현을 바라보며 마치 정해진 일정을 알려주듯 말했다. “모레 비즈니스 파티가 있어. 네가 동행해 줘야겠어.” “그건 좀 아니지 않아? 내가 육씨 가문 안주인인 것도 아니고.” 임지현은 핑계를 대며 자리에서 일어나 휴지를 가지러 가려 했다. 그러나 육현재가 그녀를 한 번에 끌어당겼다. 이내 팔로 허리를 단단히 감싸며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았다. “명분이 그렇게 중요해? 그런 거라면 육씨 가문 안주인 자리를 내줄게.” 육현재가 입꼬리를 싱긋 올리며 말했다. “이거 놔! 아이가 보고 있잖아...” 임지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또다시 그의 말에 놀아나고 싶지 않았다. 육현재가 눈짓을 보내자, 곁에 서 있던 도우미가 곧장 다가와 울고 있던 이윤이를 안고 물러났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복도를 따라 멀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임지현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이윤아!” 임지현은 급히 뒤쫓으려 했지만, 육현재가 앞을 가로막았다. “내 말대로 하겠다고 약속하면 이윤이한테 보내줄게.” 뜨거운 숨결이 귓가에 닿자, 임지현은 그를 거칠게 밀쳐내며 울부짖듯 물었다. “날 여기에 가둬놓은 사람이 누군데! 나한테 다른 선택권이 있어?” 그녀는 성난 걸음으로 아이를 따라나섰다. 육현재는 두 걸음 물러서 멈춰 섰다. 급히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 어두운 파문이 일렁였다. 이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임지현, 누가 뭐래도 넌 내 여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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