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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커다란 빗방울들이 건조했던 땅을 적시고 미세하게 맴돌던 먼지들마저 순식간에 없애버렸다. 한유설은 마지막 침대 시트를 품에 안은 채 빗길을 뚫고 허겁지겁 별장 안으로 달려갔다.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우산을 챙길 틈도 없이 밖으로 나가 말리고 있던 시트들을 다 거두어들여 오느라 몸이 쫄딱 젖어버렸다. 한유설은 조금 차가워진 몸을 두 손으로 감싸며 비 내리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곳이 책 속이라는 사실이 아직도 잘 믿어지지 않았다. 24시간 전, 평범한 직장이었던 한유설은 돌연 네 명의 남자 주인공들이 한 명의 여자 주인공을 지독히도 사랑하는 소설 속 악녀의 몸에 빙의해버렸다. 여자 주인공도 악녀도 모두 유명 아이돌인 남자 주인공들이 사는 저택의 도우미였지만 타고난 따뜻한 심성으로 남자 주인공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은 여자 주인공과 달리 대놓고 천박하게 유혹하며 시선을 끌려 했던 악녀는 남자 주인공들의 관심은커녕 질타와 경멸만 받았다. 그리고 나중에는 여자 주인공을 질투해 몇 번이나 해하려 하다가 처참한 몰골로 별장에서 쫓겨났을 뿐만 아니라 그 악행이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퍼져 말 그대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한유설은 소설 속 내용을 전부 알고 있었기에 악녀의 몸에 빙의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주인공들과 최대한 멀어지려고 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떠오른 지 3초도 안 돼 금방 사라지고 말았다. 반년 동안 열심히 일하겠다는 내용의 근로 계약서가 이미 체결되어버린 상태였으니까. 그것도 원작 속 악녀의 이름이 아닌 ‘한유설’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처음에는 그 사실이 무척 당황스러웠지만 생각해보면 그녀가 빙의했을 당시 악녀는 이미 죽어버린 상태이기도 했고 애초에 소설책에 들어온 것부터 말도 안 되는 일이었기에 이 상황을 만든 무언가가 설계한 거라고 생각하면 쉽게 납득이 갔다. 사실 어차피 책 속이라 계약서 같은 건 무시하고 바로 도망가버릴 수도 있었지만 계약을 파기할 시 어마어마한 위약금을 물어야 한다는 조항이 있기도 하고 아직 책 속에 얼마나 더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기에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한유설은 눈 딱 감고 6개월을 버텨보기로 했다. 평판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저택에서 쫓겨나게 된 건 주인공들과 깊게 엮이려 했던 탓이니 그 행동만 달리하면 계약이 끝나는 순간 쥐도 새도 모르게 저택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 아직 정오일 뿐인데 소나기로 하늘은 어느새 어둑해져 버렸고 바람까지 미친 듯이 불어치는 것이 꼭 금방이라도 재앙이 들이닥칠 것만 같았다. 한유설은 한참이나 멍하니 밖을 바라보다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에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녀와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여자가 퉁명스러운 얼굴로 시트를 집어 들며 세탁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행동이며 눈빛이며 이 몸의 원래 주인, 즉 악녀를 싫어하는 티가 너무나도 잘 느껴졌다. 악녀는 이 저택에서 환영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기에 한유설은 별다른 말 없이 자신의 유니폼을 훑어보았다. 이렇게 젖어버린 상태로는 일을 할 수가 없어 그녀는 일단 자신의 방으로 가 옷을 갈아입으려고 했다. 그런데 1층 오른쪽으로 두어 걸음 정도 걸었을 때 갑자기 현관문이 열리더니 남주들의 총괄 담당 매니저인 오은지가 들어와 그녀를 불렀다. “유설 씨, 잠깐 나 좀 도와줘요.” 매니저는 말을 마친 후 한유설이 뭐라 반응할 틈도 없이 다시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한유설은 입만 뻥긋거리다 결국 홀딱 젖은 몸을 한 채 밖으로 나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친 듯이 내리던 비가 지금은 그저 보슬보슬 내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 덕에 정원은 섬뜩하고 음산한 광경이 아닌 물기를 먹은 아름다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한유설이 별장 입구에 세워진 벤 쪽으로 다가가자 오은지가 차 문을 열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운전기사는 잔뜩 취한 남자를 조심스럽게 부축하며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운전기사도 남자였지만 힘에 부치는지 몸을 휘청거리며 중심도 간신히 잡고 있었다. 하긴 키가 무려 187cm인 남자를 혼자 업으려고 하니 힘들 만도 했다. “뭐해요? 빨리 와서 돕지 않고.” 오은지가 한유설 쪽으로 손을 휘저으며 외쳤다. 한유설은 솔직히 말하면 업혀있는 남자, 즉 남주들 중 한 명인 심해원과는 그 어떤 신체 접촉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심해원의 옆으로 다가가 어떻게 부축할지 고민하다 뒤로 가며 조금이라도 무게를 줄이려 했다. 그런데 그때 뭔가가 불편했던 건지 심해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뒤로 젖혔고 한유설은 갑자기 다가오는 남자의 등에 깜짝 놀라며 얼른 두 손으로 그의 허리를 꽉 잡고 뒷발에 힘을 주었다. 힘을 순간적으로 폭발시킨 덕에 다행히 뒤로 넘어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심해원은 복부를 세게 압박당한 바람에 짧은 신음을 내며 고개를 푹 떨궜다. “유설 씨, 괜찮아요? 뒤로 넘어가는 줄 알고 깜짝 놀랐네!” 오은지가 눈이 커져서는 얼른 다시 심해원의 몸을 앞으로 젖히며 물었다. “네... 괜찮아요.” 다시금 자세를 안정적으로 잡은 운전기사는 오은지와 한유설의 도움을 받으며 천천히 2층 방으로 올라왔다. 세 명은 심해원을 소파에 눕힌 후 한시름 놨다는 듯 땀을 닦아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우리는 이만 갈 테니까 해원 씨 잘 부탁해요.” 오은지가 한유설을 바라보며 말했다. “?” 한유설은 숨을 몰아쉬며 휴식을 취하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제가요?” “아니면요? 여기 유설 씨 말고 누가 더 있어요?” 오은지는 그렇게 말하며 가방을 챙기다 문득 얼마 전에 다른 도우미에게서 들었던 보고가 떠올라 다시 말을 바꿨다. “아니다. 혼자면 힘들 테니까 음... 유다정 씨도 불러서 둘이 같이 여기서 돌보도록 해요.” ‘보는 눈이 있으면 허튼짓은 못 하겠지.’ “네, 알겠습니다.” 한유설은 고개를 끄덕인 후 소설 속 여자 주인공인 유다정에게 문자를 보냈다. 문자를 다 보낸 뒤에는 심해원 쪽으로는 눈길도 돌리지 않고 아까부터 신경이 쓰였던 자신의 젖은 유니폼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오은지는 그런 한유설의 행동을 빤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사실 며칠 전부터 한유설이 허튼 수를 쓰며 남자들을 유혹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던 터라 해고할까도 생각했었지만 심해원을 부축하고 여기까지 올라올 때의 과정을 쭉 지켜본 결과 딱히 다른 마음은 없어 보였다. 그리고 유다정에게 연락해 함께 돌보라 했을 때도 기다렸다는 듯이 문자를 보냈고 말이다. ‘흠. 보고 받았던 것과는 많이 다른데.’ 오은지는 잠시 고민하다 한유설을 해고해버리면 또 시간을 내 새로운 도우미를 뽑아야 하기에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오은지와 운전기사가 떠난 후 방 안에는 심해원과 한유설, 이렇게 두 명만 남게 되었다. 심해원은 취한 탓에 얼굴이 살짝 빨개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잘생겼다. 오히려 술에 취하니 조금 더 나른하고 섹시한 분위기가 풍기는 듯했다. 한유설은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다 뭔가에 홀리는 듯한 기분이 들어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얌전히 누워있던 심해원이 몸을 움찔거리며 뒤척이더니 소파 바깥쪽으로 머리를 스르르 돌렸다. “!” 그런데 하필이면 머리를 돌린 곳이 아까 운전기사가 들어오다 넘어트린 탁자 쪽이라 한유설은 얼른 탁자를 치워버리며 손으로 심해원의 팔을 안쪽으로 밀었다. 하지만 그 손길이 영 불편했던 건지 심해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대로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 소파로 끌어당겼다. 중심을 잃은 한유설은 얼떨결에 소파에 누웠다가 곧바로 덮쳐오는 남자의 몸에 깜짝 놀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심해원은 한유설의 몸 위에 자신의 몸을 겹치고는 그녀의 귓가에 고른 숨을 내뱉으며 다시금 편안한 얼굴을 했다. 한유설은 귓가와 목 쪽에 그대로 전해지는 뜨거운 입김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필이면 제일 예민한 두 곳에 숨결을 불어넣은 탓에 그녀는 이를 꽉 깨물며 얼른 심해원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심해원 씨, 일어나봐요. 나 이러다 압사당해 죽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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