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잠시 후.
석양빛이 소파에 떨어지자 가만히 누워있던 심해원이 미간을 찌푸려지며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마사지하려다가 맞은편 소파에 앉아있는 여자를 보고 움직임을 멈췄다.
소파에 거의 눕다시피 한 한유설은 모든 긴장을 다 풀고 있는 상태인데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리고 평범하디 평범한 도우미 유니폼도 그녀가 입으니 값비싼 옷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심해원은 조금만 꼬집으면 금방 빨개질 것 같은 그녀의 다리를 가만히 바라보다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움직였다.
뒤척이는 소리에 눈을 뜬 유다정은 엎드려 있던 몸을 바로 세우며 그에게 물었다.
“깨셨어요?”
금방 잠에서 깼는데도 여전히 매우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심해원은 한유설에게 있던 시선을 돌리며 조금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은지 씨가 부탁한 겁니까?”
심해원의 말이 끝나자마자 한유설도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깼다. 하지만 바로 정신을 차린 유다정과 달리 멍한 얼굴로 심해원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유다정은 실컷 잔 듯한 한유설의 얼굴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금방 다시 온화한 표정으로 돌아와 심해원의 말에 답했다.
자기도 깜빡 졸았다는 건 그새 잊은 듯했다.
“네, 저랑 유설 씨한테 부탁하시고 가셨어요.”
유다정은 그렇게 말하며 탁자 위에 있던 미온수를 심해원에게 건넸다.
한유설은 정신을 완전히 차린 뒤에도 자리에서 일어나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만약 지금 끼어들었다가는 잘 보이려 한다는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으니까.
유다정과 가까이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척을 질 생각도 없었기에 지금은 투명인간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더 나았다.
유다정은 물을 건네준 후 조금 찝찝한 얼굴로 한유설을 힐끔 바라보았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자기 스스로를 어필하느라 심해원이 눈을 뜨자마자 엄청 시끄러웠을 테니까.
사실 조금 전에도 한유설에게 물컵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유다정은 만반의 준비를 다 했었다. 그런데 한유설은 물컵을 빼앗으며 끼어들기는커녕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으며 심지어는 하품까지 해댔다.
심해원은 유다정의 시선을 따라 다시금 한유설 쪽을 바라보았다.
한유설은 기다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하품하다 두 쌍의 시선이 나란히 자신을 향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왜 저렇게 봐. 일할 때 하품하면 안 된다는 규정은 없지 않나? 혹시 있는 건가...?’
심해원은 조금 복잡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은근히 몸매를 드러내며 유혹하던 여자였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잠시, 그는 차가운 말투로 한유설에게 말했다.
“한유설 씨는 이만 나가보세요.”
이번에는 방법을 바꿔 순진한 척 유혹하려 들려는 게 분명했다.
갑작스럽게 얼어붙은 공기에 유다정은 흠칫하더니 심해원의 시선이 한유설에게 있는 걸 보고 안심하며 몰래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난리 나겠네. 또 소리를 지르면서 왜 그렇게 자신에게만 차갑냐고 하겠지.’
유다정은 안 봐도 비디오라는 듯 한유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녀의 예상과 달리 한유설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러고는 아무런 미련도 없이 방을 나섰다.
한유설은 방에서 나온 후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몸도 찌뿌둥하고 불편했는데 먼저 나가라고 해줘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려가 보니 청소 담당 도우미들은 어느새 퇴근하고 없었고 별장도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아직 일할 게 남아있던 한유설은 자기 방이 아닌 부엌으로 향했다.
2층.
둘만 남게 되자 유다정은 조금 쑥스러운 듯 시선을 살짝 내렸다.
심해원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마사지하며 피곤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다정 씨도 이만 나가보세요.”
그다지 다정한 말투는 아니었지만 한유설을 대했을 때보다는 확실히 말투가 많이 온화해졌다.
유다정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소를 지었다.
“혹시 속이 안 좋거나 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저는 언제든지... 달려올 수 있어요.”
조금 티 나게 보인 관심이라 혹시라도 심해원이 불쾌해하면 어쩌나 했지만 다행히 그는 소파에 몸을 기대며 별다른 반응 없이 눈을 감았다.
“그러죠.”
유다정은 조금 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기분 좋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손잡이를 잡으려던 그때 등 뒤에서 심해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취해서 정신이 없었을 때 내가 억지로 소파에 눕혔던 사람, 유다정 씨입니까?”
유다정은 그 말에 문득 이 방으로 들어왔을 때 봤던 광경이 떠올랐다. 한유설이 다급한 목소리로 도와달라고 했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다친 곳은 없었어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유다정 본인도 자신이 왜 이런 말을 했는지 몰랐다. 그저 뭔가에 홀리듯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이번 일은 나중에 보상해 드리죠.”
심해원은 그녀의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전 정말 괜찮아요.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 주세요.”
유다정은 고개를 저으며 진심으로 그럴 필요 없다고 얘기했다. 만약 보상이라도 받았다가 거짓말인 게 들켜버리면 그때는 상당히 민망한 상황이 연출 될 테니까.
그녀는 단지 이번 일로 심해원에게 조금이라도 자신의 존재가 어필이 되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심해원은 별다른 대꾸 없이 다시 눈을 감았다. 그녀가 뭐라 하든 자신이 했던 행동은 누가 봐도 무례한 행동이었기에 꼭 보상해줄 생각이었다.
1층.
2층에서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한유설은 과일을 깎으며 네 개의 접시에 예쁘게 담았다.
남주들은 과일 취향이 다 달랐기에 신경 써서 플레이팅 할 필요가 있었다.
한유설은 과일을 다 담은 후 조금 이따 가져갈 생각으로 다시 냉장고 안에 넣어두었다.
냉장고를 닫을 때도 그녀는 평소 습관처럼 쾅 닫는 것이 아닌 아주 조심스럽게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닫았다. 망가트리기라도 하면 월급에서 깎이게 되니까.
과일 껍질들을 정리하기 위해 싱크대 쪽으로 몸을 돌린 한유설은 아무런 기척도 없이 부엌으로 들어온 여자를 보고 잠시 움찔했다가 금방 다시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부엌으로 들어온 여자는 다름 아닌 아까 점심때 말없이 시트를 집어 갔던 그 여자 도우미였다.
정수연은 자신을 무시한 채 부엌 정리를 하는 한유설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원래라면 자신을 보자마자 알랑거리며 네 명에 관한 정보를 캐내려고 해야 하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뭐지? 또 무슨 수작이지?’
“집사님이 그러는데 이따 과일 가져다줄 때 백도운 씨 방은 내가 들어가는 게 좋겠다고 하셨어요.”
정수연이 턱을 살짝 치켜들며 말했다. 마음속 깊이 한유설을 깔아보고 있다는 게 너무나도 티가 많이 났다.
한유설은 흐르는 물에 칼을 닦으며 고개 한번 돌리지 않은 채 답했다.
“알겠어요.”
정수연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마치 신기한 동물을 보듯 한유설을 빤히 바라보았다.
보통은 이런 얘기를 들으면 자신이 가져다주면 안 되냐고 열심히 부탁을 해와야 하는데 한유설의 태도는 너무나도 덤덤했다.
5분 후, 정리를 마친 한유설은 정수연을 자연스럽게 스쳐 지나가며 유유히 부엌을 떠났다.
“뭐야? 왜 저래? 어디 아픈가?”
정수연은 그 뒤로도 한참이나 계속 부엌에 서 있었다.
한유설은 부엌에서 나온 후 가벼운 발걸음으로 직원 식당에 도착했다. 비도 맞고 힘도 썼더니 오늘따라 유독 더 배고픈 것 같았다.
냉장고를 열어보자 거기에는 셰프가 직원들을 위해 준비해둔 음식이 들어있었고 한유설은 그중 하나를 꺼내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3분 정도가 지나니 맛있는 냄새가 공간 전체에 퍼져갔다.
한유설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자리에 앉고는 얼른 수저를 들어 음식을 입에 넣었다.
“아, 진짜 너무 맛있다.”
높은 월급을 제외하고 마음에 드는 게 하나 더 있다면 그건 다름 아닌 이곳 셰프의 요리 솜씨였다.
분명히 질리도록 먹었던 음식인데도 셰프가 하면 뭔가가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