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정수연은 내뱉은 말대로 정말 온시열의 방문 앞에서 멈춘 한유설을 보며 입을 떡하고 벌렸다.
‘뭐야? 정말 타깃을 바꾼 거야?! 정말 백도운을 포기한 거라고?’
한유설은 정수연이 놀라든 말든 손을 들어 온시열의 방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네, 들어오세요.”
방문 안쪽에서 다정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수연은 한유설이 안으로 들어간 것을 본 뒤에야 다시 얼떨떨한 얼굴로 서빙 카트를 움직였다.
한유설이 들어간 방 안에는 편한 옷차림의 남자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남주들 중 한 명인 온시열은 잘생긴 얼굴에 나른하고도 온화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그런 남자였다.
온시열은 문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며 안쪽으로 걸어들어오는 한유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누가 봐도 출중한 외모에 몸매마저 예쁜 그녀였지만 온시열의 눈빛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정말 일말의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온시열은 한유설이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시선을 한번도 돌리지 않았고 자세도 미동 한번 하지 않았다.
한유설은 그의 시선을 다 느끼고 있었지만 티 나지 않게 시선을 피하며 손에 든 과일 그릇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맛있게 드세요.”
그러고는 말을 마친 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방을 나섰다.
달칵.
문이 닫힌 후 한유설이 옆을 바라보자 정수연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백도운의 방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정수연은 황급히 문을 닫더니 서빙 카트를 밀며 빠르게 한유설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자리에 멈추자마자 한유설을 째려보았다.
‘내가 왜 한유설 때문에 이런 봉변을 당해햐 해?! 전에는 이렇게까지 무섭게 굴지는 않았는데!’
정수연은 그렇게 무서운 얼굴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나머지는 유설 씨가 해요.”
정수연 신경질적으로 카트를 건네주며 대놓고 하기 싫은 티를 냈다.
한유설은 그런 그녀의 태도에 기분이 상할 만도 한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카트를 밀며 왼쪽으로 걸어갔다.
이 일만 끝내면 퇴근이라 굳이 정수연과 언쟁하며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정수연은 한유설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허탈하기도 하고 또 짜증이 나기도 해 발을 쿵쿵 굴렀다.
카트를 밀고 우주한의 방 앞에 도착한 한유설은 아까도 그랬듯 먼저 노크부터 했다.
“누구세요?”
우주한이 물었다.
“과일 가져다주러 왔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짜증이 조금 묻어있는 목소리였지만 문을 사이에 두고 있어 한유설은 그가 어떤 상태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드디어 우주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요.”
한유설은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연 다음 과일 그릇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막 샤워를 끝낸 건지 우주한의 머리는 살짝 젖어있었다. 그는 잘생긴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소파에 앉아 리모컨을 꾹꾹 눌렀다.
한유설은 우주한의 바로 옆에 티슈가 놓여있는 걸 보았지만 모태 솔로인 그녀는 그게 뭘 의미하는지 몰랐기에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과일을 내려놓았다.
우주한은 가뜩이나 예민한 타이밍이었던 데다 하필이면 과일을 가져다준 사람이 한유설이라 한층 더 짜증이 났다.
“또 그쪽이에요?”
한유설은 대놓고 싫은 티를 내는 그의 말투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오늘 담당은 저라서요. 제가 오는 게 싫으시면 오은지 씨한테 따로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한유설은 자기 스스로를 감정이 없는 로봇이라 생각하며 매우 공적으로 답변했다.
우주한은 맑고 투명한 눈빛으로 얘기하는 그녀를 보고는 서서히 인상을 풀었다. 모른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 그가 뭐 하고 있었던 건지 모르는 얼굴 같았다.
“이만 나가봐요.”
한유설은 짧게 고개를 숙인 후 누가 등이라도 떠밀 듯 아주 빠르게 방에서 나왔다.
우주한은 그런 그녀의 행동을 이상하다는 눈길로 쳐다보다 이내 도우미의 행동 분석이나 하고 있는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져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유설은 우주한의 방에서 나온 후 다시 카트를 밀며 마지막 방인 심해원의 방 앞에 도착했다.
똑똑.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가장 먼저 기타 소리가 들려왔다.
심해원은 두 손을 자유롭게 움직이며 기타를 쳤다. 고개가 옆으로 돌아감에 따라 머리도 자연스럽게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꼭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한유설은 묵묵히 그릇을 내려놓고는 조심스럽게 방을 나섰다.
심해원의 연주는 한유설이 들어오고부터 나갈 때까지 한순간도 끊긴 적이 없었다. 애초에 문 쪽으로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으니까.
할 일을 다 마친 한유설은 문을 닫은 후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현실 세계나 책 속이나 퇴근 시간은 언제나 옳고 좋았다. 일하는 시간이 길기는 하지만 그만큼 월급으로 보상해주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한유설은 단순하고 쉽게 만족하는 타입이라 이왕 이렇게 된 거 도망가기 전까지 할 수 있는 한 돈을 많이 모으자고 결심했다.
1층으로 내려가 보니 다른 도우미들은 다 방으로 들어가 있었고 희미한 불빛만 그녀를 반겨주고 있었다.
조금 으스스한 느낌에 한유설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빠르게 서빙 카트를 원위치시킨 다음 얼른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아무도 없는 거실을 지날 때 어디선가 ‘다다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이에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손으로 두 팔을 감싸며 빛의 속도로 뛰었다.
와인을 가지러 내려왔던 우주한은 빠르게 달려가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빠르게 달려 방으로 들어온 한유설은 샤워를 마친 후 그대로 침대 위에 뻗어버렸다. 피곤해서 그런지 눈이 저절로 감겨왔다.
다음 날 아침.
이곳 저택에는 네 명의 남주들이 식사할 때 도우미 한 명이 꼭 뒤에 있어 줘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하지만 하필이면 제일 무서운 백도운의 심기를 건드려 버린 탓에 한유설은 집사로부터 당분간은 백도운의 눈에 띄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었다.
그래서 오늘도 그 지시를 지키며 홀로 직원 식당으로 향하려는데 집사인 조정욱이 그녀를 불러세웠다.
“유설 씨, 지금 어디 갑니까?”
“아침밥 먹으러요.”
“아침은 나중에 먹고 지금은 이쪽으로 와서 함께 도와요.”
사실 백도운을 생각하면 한유설을 데리고 오지 않는 게 맞지만 한 명이 빠지는 바람에 다른 도우미가 자리를 메꿔야 해서 상당히 불편한 상황이었다.
“네? 하지만 백도운 씨가...”
한유설은 아침 댓바람부터 백도운의 성질을 건드리고 싶지는 않았다. 심기가 불편해졌다고 월급이라도 깎으면 큰일이니까.
“며칠 반성했으니까 백도운 씨도 이제는 화를 조금 푸셨을 거예요. 하지만 오늘은 일단 심해원 씨 뒤에 서시는 게 좋겠네요.”
조정욱의 말에 한유설은 잠시 머뭇거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만약 아직도 화가 나 계시면 제 월급은... 깎이게 되나요?”
“아니요. 그럴 일은 없습니다.”
조정욱은 잠시 웃다가 금세 다시 엄숙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이 또다시 생기면 그때는 어떻게 될지 모르죠.”
한유설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 다시 그런 일 생기지 않게 하겠습니다!”
조정욱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를 데리고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
그 시각, 1층 다이닝 룸에서는 잘생기고 각기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네 명의 남자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간간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