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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저녁 6시쯤 윤성희와 진태현이 도착했다. 진서후도 고개를 푹 숙인 채 함께 따라왔는데 잘생긴 얼굴에 우울한 기색이 가득했다. 아직 요리 하나가 채 완성되지 않아 엄마는 윤성희와 진태현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두 집안이 워낙 자주 같이 밥을 먹어서 윤성희는 우리 집에 와도 자기 집처럼 편안하게 소파에 앉았다. 심심했는지 핸드폰을 꺼내 오늘 결승전 영상을 다시 봤다. “서후 너 오늘 유나가 얼마나 예쁘고 멋졌는지 모르지? 내가 보여줄게.” 윤성희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음식을 들고 나왔을 때 진서후와 윤성희가 함께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내가 부른 노래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 “이모, 아저씨, 식사하세요. 서후야, 와서 밥 먹어.” 나의 부름에 진서후가 급히 고개를 들더니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윤성희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서후를 툭 쳤다. “이런 똑똑한 애를 아내로 맞이하게 된 걸 복이라고 생각해. 알았어?” 진서후가 코웃음을 쳤다. “제가 이 대회에 나갔다면 쟤가 우승했을 것 같아요?” 그러자 윤성희가 싸늘하게 말했다. “누가 너보고 참가하지 말랬어?” 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한마디 했다. “유나한테 기회 주려고 안 간 거예요.” 그 말에 나는 속으로 웃었다. ‘또 나한테 책임을 떠넘기네? 어린 나이에 하도 많은 책임을 떠안아서 등골이 다 휘겠어.’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진서후가 나를 엄청 아낀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은 신서영 때문에 참가하지 않은 것인데. 진서후를 쳐다보는 엄마의 눈빛이 눈에 띄게 따뜻해졌다. “서후가 유나를 위해 양보했던 거구나. 너 이 녀석...” 윤성희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서로 사랑하면 됐어. 부모 입장에선 그걸로 충분해.” 그러다 뭔가 생각난 듯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다. “그나저나 유나 노래 얼마에 팔았어?” 엄마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처음엔 6백만 원 주겠다고 했는데 유나가 4천만 원 아니면 안 된다고 하니까 결국에는 그렇게 하기로 했어.” 이젠 진서후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 노래가 4천만 원이나 한다고?” 그의 목소리에 조롱과 충격, 그리고 경멸이 섞여 있었다. 진서후는 항상 내가 아무것도 못 한다고 생각했고 나의 자작곡은 더욱 무시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막 불러본 가격이었어. 안 받아주면 말자 했는데 받아줬지 뭐야.” 진서후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윤성희는 그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하고 점점 더 신나게 저작권 얘기를 했다. 진서후가 갑자기 젓가락을 탁 내려놓더니 배불렀다면서 문을 쾅 닫고 나갔다. 그제야 엄마도 뭔가를 눈치챘다. “앞으로는 이 얘기 안 하는 게 좋겠어. 서후 마음이 안 좋을 거야.” 윤성희가 생선 가시를 고르며 말했다. “신경 쓰지 말아요. 유나랑 곧 결혼할 텐데 와이프가 잘되면 쟤한테도 더 좋죠. 마음이 안 좋을 게 뭐가 있다고.” 그러고는 생선 살을 내 그릇에 덜어주었다. “많이 먹어, 유나야.” 나는 웃으며 감사의 인사를 전한 다음 계속 밥을 먹었다. 옆 그릇을 보니 밥이 많이 남아 있었다. ‘음식을 이렇게나 많이 낭비하다니. 쯧쯧.’ 그날 그 식사 이후에 진서후를 한 번도 보지 못했고 그가 뭘 하는지도 전혀 알지 못했다. 사실 관심도 없었다. 다시 진서후를 만난 건 나경 그룹 신입 교육을 받으러 갔을 때였다. 그는 신서영의 어깨를 껴안고 아주 깔깔거리며 웃었다. 회사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서후 씨 여자친구예요?” 진서후는 자랑스러워하며 신서영을 다정하게 쳐다봤다. “여자친구 같아요?” 애매한 대답이었지만 부정하지 않았기에 다들 그들이 커플이라고 여겼다. 나는 그들 뒤에 서서 그 모습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들이 계단을 올라가자 나도 뒤따라 올라갔다. 진수혁의 사무실이 8층에 있었다. 창업자들이 길한 숫자를 좋아한다더니 역시나였다. 진수혁의 비서인 한다은은 30살 정도 돼 보이는 여자였는데 회사 사람들은 그녀를 한 비서님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항상 단정한 정장을 입고 다녔다. 나를 처음 봤을 때 굳은 얼굴로 훑어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가냘픈 팔다리로 버틸 수 있겠어요? 회사도 참, 왜 건장한 남자 비서를 안 뽑고 갓 졸업한 대학생을 괴롭히는 건지.” 한다은의 눈가가 피곤에 절어 있었고 컨디션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진수혁의 비서로 일하는 게 정말 힘든 모양이었다. 나는 가슴을 치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 할 수 있어요.” 한다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먼저 대표님께 인사드리러 가요.” 사무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사무실에 아무도 없어 한다은은 나에게 잠시 기다리라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초조해지고 불안해졌다. 그때 문이 열리더니 190cm는 족히 돼 보이는 건장한 남자가 들어왔다. 검은 셔츠 아래 근육이 터질 듯 팽팽했고 차가운 기운을 내뿜고 있어 감히 다가갈 수 없었다. 한다은이 정중하게 말했다. “대표님, 이번에 새로 뽑은 비서 온유나 씨입니다.” 진수혁의 차가운 시선이 나에게 향한 순간 나도 모르게 오싹한 기운이 들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기억 속의 진수혁은 늘 우리에게 사탕을 사주고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름을 불러주던 다정한 사람이었다. 지금은 어쩌다 이렇게 차가워졌을까? 너무 무서웠다. 한다은이 또 말했다. “대표님, 저는 나가볼 테니 얘기들 나누세요.” 그러고는 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우물쭈물했다. “삼촌... 아니 대표님...” 진수혁은 진씨 가문에서 처음으로 창업한 사람이었다. 창업 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한 듯했다. 그는 뭔가 생각하면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나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전까지 싸늘하기 그지없던 그의 두 눈에 부드러운 미소가 스친 것 같았다. “계속 음악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여기 와서 비서를 한다고?” “사실 음악에 별로 흥미도 없고 재능도 없어요. 이번엔 그냥 운이 좋았던 거예요. 전 회사에서 일하며 자신을 단련하고 싶어요.” 진수혁이 반신반의하며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서후랑 연애하려고 내 회사에 온 것 같은데? 서후가 내 회사에 출근하겠다고 하자마자 너도 바로 비서로 왔어. 내 코앞에서 놀고먹을 생각 따위 하지 마. 일은 제대로 해야 해.” “걱정하지 마세요, 삼촌. 열심히 할게요.” 그의 입가에 미소가 새어 나왔다. 웃을 때 두 눈이 다 반짝였다. “울보 온유나가 내 비서가 될 줄은 몰랐네.” 그 말에 나는 바로 반박했다. “울보라니요!” “너 어릴 때 자주 울었잖아.” “그건... 애들이 자주 우는 건 정상 아니에요? 이젠 안 울어요.” 진수혁이 눈웃음을 지으며 나를 쳐다봤다. “그래. 알았어. 앞으로 일하다가 힘들어도 울면 안 돼.” “절대 안 울어요.” 진수혁의 눈엔 내가 아직 어린애로 보이나 보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내가 이미 한 번 죽었다 살아났다는 것을. 진수혁의 두 눈에 담긴 미소가 더 짙어졌다. “서후한테도 고자질하지 말고.” “안 그래요.” ‘서후한테 고자질한다고? 이 세상에서 제일 못 믿을 사람이 진서후야.’ 진수혁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책상 위를 뒤져 서류 한 뭉치를 건넸다. 뼈마디가 선명한 기다란 손가락이 참으로 고왔다. “이거 먼저 보고 있어. 오후에 테스트할 거야.” “알겠어요.” 나는 열심히 교육을 받았고 하루 종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전에는 비서 일이 이렇게 바쁜 줄 미처 몰랐다. 하지만 지금의 고생은 다 가치가 있는 고생이었다. 드디어 퇴근 시간이 되었다. 얼른 쉬고 싶다는 생각에 계단을 내려가는데 신서영과 마주쳤다. 신서영이 반갑게 인사했다. “유나야, 우리 진짜 인연이 있나 봐. 예전엔 같은 반 친구였는데 이젠 동료가 됐어.”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앞으로 잘 부탁해.” 신서영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나야말로 너랑 서후한테 잘 부탁해야지.” 너무 피곤한 나머지 더는 그녀와 가식을 떨기 싫었다.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급히 내려가려는데 신서영이 발을 내밀어 나를 넘어뜨렸다. 그 바람에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나와 신서영이 계단 아래로 굴렀다. 다행히 계단이 높지 않아 죽진 않았으나 무릎이 부딪혀 너무 아팠다. 비명을 들은 진서후가 허둥지둥 달려왔다. “서영아, 무슨 일이야?” 신서영이 억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유나랑 같이 넘어졌어...” 진서후는 숨을 몰아쉬며 급히 신서영을 부축했다. “어디 다쳤어?” “모르겠어... 그냥 너무 아파...” “병원에 데려다줄게.” 진서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신서영을 안아 들고 가버렸다. 신서영이야말로 그의 진짜 여자친구인 것처럼 나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그는 애초에 나를 여자친구로 여기지 않았으니까. 그의 품에 안긴 신서영은 나를 보며 씩 웃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발의 통증을 참으면서 힘겹게 일어났다. 그런데 서기도 힘들 정도로 통증이 심했다. 그때 지나가던 삼촌이 벽을 짚고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보자마자 얼굴을 찌푸렸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났다. “유나야, 무슨 일이야?” 진수혁의 시선이 피가 흐르는 나의 무릎에 닿았다. 피범벅인 데다가 살점이 뭉개진 무릎을 본 순간 얼굴이 굳어지더니 바로 쪼그려 앉아 상처를 살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어? 서후는? 서후한테 병원에 데려다 달라고 해.” “실수로... 넘어졌어요. 약 바르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삼촌. 서후는 친구랑 갔어요. 괜찮아요.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나는 일부러 속상한 척하며 진서후가 혼날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진수혁이 고개를 들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내 두 눈을 그윽하게 쳐다봤다. 그러고는 허리를 잡고 번쩍 안아 올렸다. 순간 당황한 나는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나의 얼굴이 그의 단단한 가슴팍에 닿았고 은은한 향수 냄새가 코를 스쳤다. “삼촌...” 진수혁이 고개를 숙이자 그와 눈이 마주쳤다. 따뜻한 숨결이 느껴지면서 묘하게 설렜다. 나는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낮게 물었다. “삼촌, 뭐 하시는 거예요?” “병원에 데려다줄게.” 병원 가는 길에 진수혁은 진서후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나 다쳤어. 빨리 병원으로 와.” 전화기 너머의 진서후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삼촌, 저도 지금 누가 다쳐서 갈 수 없어요.” 그때 누군가 그를 부르자 급히 말했다. “저 지금 바빠요, 삼촌. 유나 혼자 병원에 가라고 하든지 걔 엄마 아빠 부르든지 해요.” 그 말에 나는 싸늘하게 웃었다. ‘매정한 놈 같으니라고.’ 진수혁은 진서후의 태도에 충격받은 듯했다. 한 달 뒤 곧 결혼할 예비 신부가 다쳤는데도 전혀 신경 쓰지 않으니 놀랄 만도 하지. 진서후가 전화를 끊자 진수혁의 눈빛이 무섭게 변했고 차 안의 온도도 급격히 내려갔다. “이 녀석, 돌아가면 절대 가만 안 둬.” 나는 재빨리 진수혁을 말리면서 속상한 척하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삼촌, 서후가 말했잖아요. 다친 사람이 있다고. 저 다 이해해요. 서후는 남을 돕기 좋아하는 착한 애니까 혼내지 마세요.” 나를 쳐다보는 진수혁의 그윽한 두 눈에 옅은 미소가 떠오르더니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서후가 너 같은 애 만난 건 진짜 복 받은 거야.” 나는 시선을 늘어뜨렸다. 아쉽게도 진서후에겐 그 복을 누릴 자격이 없었다. 병원에 도착한 후 진수혁이 진찰 접수를 도와줬고 진찰을 받을 때까지 계속 옆에 있어 줬다. 그 사이 노트북을 열어 급한 업무를 처리했다. 나는 그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용히 있었다. 그러다 가끔 힐끔거리곤 했다. 진수혁의 얼굴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나보다 6살 많았고 남자만의 독특하고 성숙한 매력을 풍겼다. 나의 시선을 눈치챈 듯 진수혁이 고개를 들었다. 깊은 눈빛으로 나를 보며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뭘 봐?”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시선을 위로 돌렸다. “그냥 여기저기 둘러봤어요...” 마침 나의 진찰 차례가 되어 어색한 분위기에서 탈출하듯 벌떡 일어났다. 진수혁은 가볍게 웃고는 나를 부축해 진찰실로 들어갔다. 전화가 오자 다시 밖으로 나갔다. 의사는 내 상처를 살펴보고 뼈도 만져봤다. 골절이나 다른 부상이 없는 걸 확인한 다음 약을 처방해줬다. 나는 벽을 짚고 절뚝거리며 나갔다. 진수혁이 얼굴을 살짝 찌푸린 채 계속 통화하고 있었는데 어딜 가든 항상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진서후가 신서영을 부축하고 있었고 그의 눈빛이 걱정으로 가득했다. 신서영은 연노랑 원피스에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환히 웃고 있었다. 둘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안구 정화였다. 진수혁도 그들을 발견하고 빤히 쳐다보다가 두 사람이 모퉁이를 돌며 사라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전화를 끊고 살기 어린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무래도 진서후에게 따지러 가려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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