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심은지의 말에 강우빈은 무려 30초 동안이나 침묵했다.
그녀가 전화를 끊으려 하자 강우빈은 약간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꼭 이렇게 냉정해야겠어? 심은지, 지금은 제멋대로 굴 때가 아니야. 은우가 아직 병원에 있어. 엄마라면 당연히 와야 하는 거 아니야? 빨리 돌아와. 아무리 화가 났다고 해도 지금 다쳐서 입원해 있는데 아이와 싸우면 안 되는 거잖아.”
강우빈의 목소리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강은우가 철없이 심은지를 싫어하고 한서연을 좋아한다고 몇 마디 했다고 해서 심은지가 홧김에 아이와 다툰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주머니를 고용했잖아? 은우가 국을 먹고 싶다 하면 아주머니가 끓여서 갖다주면 되잖아.”
심은지는 강우빈이 계속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갑자기 억울해졌다.
‘엄마는 무조건 헌신해야 하는 걸까? 억울해도 참고 또 참고 끝없이 받아주기만 해야 하는 걸까?’
강우빈은 모자 관계를 앞세워 도덕적으로 그녀를 압박하려 했지만 강우빈 역시 강은우의 아버지였다.
그는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
“은우가 먹고 싶어 하는 건 네가 직접 끓여준 국이란 말이야!”
“그 애가 먹고 싶다고 해서 내가 모든 일을 제쳐두고 직접 끓여줘야 해?”
심은지는 비웃듯 되물었다.
강우빈은 그녀가 그렇게 말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잠시 말이 막혔다.
“내가 아니라도 한서연이 있잖아? 은우를 잘 돌봐줄 수 있을 거야.”
“심은지, 넌 은우의 친엄마야. 설마 네가 져야 할 엄마의 책임을 남한테 떠넘기겠다는 거야?”
심은지는 차갑게 냉소하며 말했다.
“이제 와서 내가 강은우의 엄마라는 걸 떠올린 거야?”
그녀의 말투는 퉁명스럽고 빈정거리는 듯했다.
강우빈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심은지, 지금 너랑 싸우고 싶지 않아. 어디에 있던 당장 돌아와. 밤새 집에도 안 들어오고 그 놈팡이랑 같이 있은 건 따지지 않을게. 하지만 아들이 네가 끓여준 국을 먹고 싶다는데...”
심은지는 ‘놈팡이’라는 세 글자를 듣는 순간, 눈빛이 차갑게 빛나며 전화를 끊었다.
‘강우빈의 눈에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여자로 비치는 걸까? 외출만 하면 남자를 만나러 나가는 여자?
“은지야?”
유수아는 심은지의 감정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채고 다가와 그녀를 안아주며 달랬다.
“수아야, 배고파. 라면 먹고 싶어. 계란이랑 소시지 추가해서.”
심은지는 울적한 기분을 재빨리 털어내고 유수아의 팔을 껴안으며 애교를 부렸다.
갑자기 라면이 너무 먹고 싶어졌다.
지난 몇 년 동안 아들을 잘 키우기 위해 인스턴트 음식은 거의 입에 대지도 않았고 심지어 아들 앞에서는 자신이 싫어하는 채소조차 억지로 웃으며 먹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더 이상 아들을 위해 희생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는 자신이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먹을 수 있다.
“흥, 네가 친구보다 남자를 더 소중하게 여기도록 두지 않겠어. 몇 년 동안 연락도 없다가 이제 와서 부리기는. 기다려!”
유수아는 과장된 표정으로 입을 삐죽거리더니 라면을 끓이러 갔다.
“윙윙.”
휴대폰이 진동하며 화면이 켜졌고 카운트다운 11일이라는 글자가 떴다.
눈 깜짝할 사이 또 하루가 지나갔다.
앞으로 11일이 지나면 그녀와 그는 더 이상 아무런 관계도 아니게 된다.
심은지는 시간을 계산하다가 결심했다. 밥을 먹고 나서 병원에 가 산전 검사를 받기로.
...
병원, 병실.
침대에 누워 있던 강은우는 칭얼거리며 이불을 걷어찼다.
“옥수수수프를 먹을 거예요.”
“도련님, 이게 바로 옥수수수프예요. 다시 한번 드셔 보세요.”
옆에서 주혜린이 숟가락으로 옥수수수프를 떠 강은우의 입에 가져갔다.
하지만 강은우는 입을 삐죽거리며 울먹이는 얼굴로 한 입 맛 보더니 곧 뱉어냈다.
“아니에요, 엄마가 만든 옥수수수프는 이런 맛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는 억울한 듯 눈물을 글썽이며 강우빈을 향해 외쳤다.
“저는 옥수수수프를 먹고 싶단 말이에요!”
강우빈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전화기 너머에서 냉담하게 굴던 심은지의 태도가 떠올랐다.
가장 아끼는 아들을 '미끼'로 써도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련님, 이건 정말 사모님이 만드신 옥수수수프와 똑같은 맛이에요.”
주혜린은 다급히 강우빈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사모님의 레시피 그대로 만들었어요. 게다가 사모님도 제 요리 솜씨를 인정하셨잖아요. 제가 만든 게 사모님이 만드신 것과 똑같다고 직접 말씀하셨어요.”
주혜린은 강씨 가문에 온 지 고작 이틀밖에 되지 않았다. 심은지가 그녀를 가르칠 시간은 없었다.
강우빈은 의아해 물었다.
주혜린은 조심스레 대답했다.
“제가 처음 왔던 날, 사모님께서 메뉴를 두꺼운 책처럼 건네주셨어요. 그리고 도련님과 대표님께서 평소 좋아하시는 것, 습관 같은 것도 알려주셨고요.”
그녀는 여러 부잣집에서 가정부로 일해 본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첫날부터 느낄 수 있었다. 사모님은 곧 이 집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강우빈의 안색은 점점 굳어졌다.
심은지는 이미 몰래 그들 부자의 일상까지 준비해 두었던 걸까?
그녀는 오래전부터 떠날 결심을 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어떻게 이렇게 매정하게 등을 돌릴 수 있단 말인가?
강우빈은 미간을 꾹 눌렀다.
어젯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강은우가 아침부터 옥수수수프를 찾으며 칭얼거려 회사에도 가지 못하고 병원으로 달려왔던 것이다.
“흑, 엄마가 만든 옥수수수프를 먹을 거예요. 이건 아니에요.”
강은우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강우빈은 결국 한서연에게 전화를 걸어 병원으로 오라고 했다.
곧 차를 돌려 병원으로 달려온 한서연은 애써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은우야, 울지 마. 서연 이모가 직접 옥수수수프 만들어줄게. 응?”
그녀도 옥수수수프를 만들 수 있었다. 예전에 심은지를 미친 듯이 따라 했기에 강우빈 부자의 취향과 습관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은우는 마치 눈앞의 한서연을 모르는 사람처럼 여전히 울기만 했다.
“은우야, 서연 이모가 뽀로로 보여줄게. 인형도 사 줄게.”
한서연은 끈질기게 달랬다. 강은우가 좋아하는 장난감과 만화 이야기를 꺼냈지만 예전 같으면 통했을 유혹이 지금은 전혀 먹히지 않았다.
강은우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고 그녀를 뿌리치고 울먹이며 강우빈에게 외쳤다.
“아빠! 저는 엄마가 만든 옥수수수프를 먹을 거예요! 아니면 아무것도 먹지 않고 먹을 거예요!”
어제까지만 해도 심은지를 싫다던 아이가 하룻밤 사이에 엄마를 찾고 있었다.
아들이 울며 심은지를 찾자 한서연의 눈빛은 서늘하게 식어버렸다.
역시 그 엄마에 그 아들이었다. 아무리 잘해줘도 소용없었다.
만약 강은우가 자신에게 매달렸더라면 지금쯤 강우빈의 마음속에서 자신은 다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서연은 이를 악물고 속으로 원망했다.
‘강은우 저놈, 평소엔 나를 엄마라고 부르며 좋아한다더니 정작 중요한 순간엔 이렇게 발목을 잡네!’
강우빈은 한서연조차 강은우를 달래지 못하자 다시 심은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강우빈의 반응을 본 강은우는 엄마에게 전화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아차린 듯 침대에서 벌떡 뛰어내리더니 훌쩍거리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
“엄마가 만든 옥수수수프를 먹을 거예요...”
엄마가 병원에 오지 않는다면 직접 별장으로 가면 되는 것이다.
강은우가 갑자기 뛰쳐나가자 강우빈 일행은 서둘러 뒤쫓았지만 이미 그는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해 있었다.
“딩동!”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 순간 강은우는 심은지의 다리에 머리를 콩 부딪쳤다.
고개를 들어 반짝이는 눈으로 엄마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엄마는 자신을 버리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엄마, 옥수수수프 끓여주러 온 거예요?”
심은지는 강은우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무릎과 다리에 작은 찰과상이 남아 있었다.
“고작 이 정도 찰과상 가지고 아직도 퇴원 못 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