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송서림은 어지러운 집안을 마주할 줄 알았지만 생각과 달리 집 안에는 은은한 레몬 향이 풍겼다. 현관 쪽에는 남자와 여자의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다른 곳도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어 마치 어지러웠던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서달수가 찍은 사진을 보지 않았다면 그는 이 집이 자신의 집이 아닐까하는 의심까지 했을 것이다. 신이서가 집을 이렇게 깨끗하게 청소했다니. 그때, 방문이 열리더니 신이서가 가운을 두른 채 걸어 나왔다. 잘록한 허리선이 송서림의 눈에 안겨 왔다. 덜 마른 머리에 빨개진 얼굴을 한 신이서를 보니 그녀를 보호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그녀는 머리를 단정히 묶었을 때보다 퍽 예뻤다. 머리 끝에 맺혀있던 물방울이 어깨 위로 떨어졌고 맑은 피부와 새하얀 다리는 방금 전 샤워를 한 덕분에 옅은 분홍색을 띠고 있어 유난히 그 모습을 본 송서림이 숨을 멈추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신이서는 머리를 옆으로 한 채 머리를 닦다 낯선 시선을 느끼고서야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신이서가 다급하게 가운을 꽁꽁 둘렀다. 분명 전수미가 송서림이 늦은 시간까지 야근을 해야 해서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는데. 귀찮음에 잠옷을 가지러 가지 않은 하필 이때, 송서림과 마주쳤다니. "왔, 왔어요?" "간 줄 알았는데 네가 이렇게 성급하게 굴 줄은 몰랐네." 송서림이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몸을 돌려 물을 마시러 갔다,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심지어 신이서를 향한 멸시도 담겨 있었다. 송서림은 말을 하다 신이서 등 뒤의 방을 바라봤다, 그 방은 송서림의 방이었다. 신이서도 그의 시선을 따라 방으로 눈길을 돌렸다가 그가 무언가를 오해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서림 씨..." "신이서, 우리 다 이 결혼이 서로가 필요해서 이루어진 거라는 거 알잖아, 그러니까 선 넘지 마." 송서림이 마지막 말을 강조하며 말했다. 원래 조금 부끄러웠던 신이서는 송서림이 그녀가 그를 유혹하려 했다고 오해하는 모습을 보곤 더욱 고개를 들지 못했다. 신이서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송서림을 보며 입을 열려던 순간, 송서림이 컵을 탁하고 내려놓으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 "옷 챙겨 입어." 경고를 마친 송서림이 서재로 걸어갔다. "잠깐만요, 서림 씨 말이 맞아요. 우리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결혼한 거. 그렇다면 저랑 사는 게 싫다면 수미 이모 거절하고 이런 재미없는 일 안 해도 되잖아요." 신이서가 송서림을 불러세워 담담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송서림이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신이서를 바라봤다. 그러자 신이서가 현관을 가리키며 말했다. "서림 씨 보기에는 정상인 것 같은데 발 크기가 다르더라고요, 사이즈가 그렇게 많이 차이 나는 건 처음 보는데 제가 병원에 같이 가드릴까요?" 신이서의 말을 들은 송서림은 멈칫했다. 그리고 속으로 이런 일 처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하수가 저지를만한 실수를 한 서달수를 욕했다. "저는 서림 씨가 시간이 늦어서 안 돌아오는 줄 알았어요, 그리고 작은 방 샤워기가 고장 났는데 제가 이 집 청소하느라 3시간을 움직인 덕분에 몸에 냄새가 너무 났거든요. 그래서 서림 씨 방에 가서 샤워 좀 한 거예요, 그게 무슨 문제가 되나요? 문제가 된다면 제가 사과드릴게요. 서림 씨가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되면 저한테 3분 주세요." "3분?" 송서림이 반문했다. "잠깐만요." 신이서는 말을 마치자마자 작은 방으로 가 1분 안에 속옷과 잠옷을 챙겨 입고 나오더니 침대 옆 서랍에서 미리 준비해 둔 서류를 가지고 나왔다. 송서림이 일부러 이 집을 어지럽혔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로 신이서는 다른 계획을 세웠다. 신이서는 내일 서류를 송서림에게 보여주려고 했지만 말이 나온 이상, 빨리 해결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다시 거실로 돌아온 그녀가 송서림에게 서류를 건네줬다. 송서림은 그런 신이서의 차림새를 보며 멍청하게 있다 다시 시선을 서류로 돌렸다. 서류의 내용을 확인한 그의 안색이 조금 달라졌다. "동거 협의서?" "네, 서림 씨가 말하지 않아도 저 마음에 안 들어 한다는 거 알 수 있어요, 저랑 결혼한 거 이모 마음 놓게 하려고 그런 거죠. 저도 수미 이모가 저 좋아해 줘서 너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 이모께서 우리 두 사람을 굳이 한집에 살게 하려고 하는 거라면 우리 사이좋게 지내봐요. 서림 씨가 저랑 헤어지고 싶은 때가 오면 저 절대 매달리지 않을 거예요 , 앞으로 어떻게 지낼지 협의서에 다 썼으니까 보충할 내용이 있는지 한 번 봐주세요." 신이서가 펜을 건네며 말했다. 하지만 송서림은 펜을 받지 않고 의심스럽게 협의서를 훑어봤다. 대부분 내용은 신이서가 말했던 대로 결혼 후 생활의 협조 사항에 대한 것이었다. 그중, 송서림의 예상을 벗어난 한마디가 있었다. [이혼 시, 자원으로 재산 분할을 포기한다.] 된장녀가 돈도 안 가지겠다고 하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야? 내가 이걸 믿을 것 같아?" 송서림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신이서가 미간을 찌푸리고 진지하게 말했다. "못 믿겠으면 공증하러 갈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사인하세요." 송서림은 참지 못하고 그런 신이서를 쳐다봤다,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과 선을 긋지 못해 안달 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여자였다. 하지만 이런 것도 좋았다, 앞으로 귀찮은 일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송서림은 펜을 받아 사인했다. 송서림이 사인하자 신이서도 망설임 없이 사인했다, 그리곤 빠진 부분이 없는지 자세히 관찰했다. 너무 열심히 보고 있었던 덕분인지 젖은 머리가 잠옷으로 떨어져 젖어가는 것도 몰랐다. 신이서가 고개를 들고 문제가 없다고 말하려던 찰나, 담배 냄새가 섞인 외투가 그녀의 몸을 덮었다. 신이서는 조금 멍청하게 몸 위에 걸쳐진 외투를 보다 뒤늦게 가슴 부근이 젖어버린 잠옷을 발견했다. 실크소재의 잠옷은 편안했지만 물이 묻으면 몸에 붙는 바람에 그녀의 몸매를 여실히 드러냈다. 심지어 그녀의 피부와 속옷 색깔까지 다 보였다. 신이서는 당황해서 외투로 몸을 감쌌다, 그녀의 얼굴은 곧 터질 듯 새빨개졌다. 신이서가 조심스럽게 송서림을 바라보자 그는 이미 그녀에게서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평소처럼 차가운 그 뒷모습을 보며 신이서는 한시름 놓았다. 송서림 같은 남자는 여자가 모자라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평범한 자신은 볼 필요도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이서는 송서림이 매너남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분명 그녀를 싫어했지만 몸이 젖은 그녀를 난감하게 하지도 않았고 그녀의 몸매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평가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과 한집에 사는 것이 너무 힘들지는 않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오히려 예전에 그녀와 함께 살았던 고운성은 늘 그녀의 몸매를 두고 지적질하며 그녀를 자존감이 부족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랬기에 신이서는 어디에서나 조금 너른 옷을 선호했다. 그 후로 고운성은 몇 번이나 신이서에게 스킨십을 시도했지만 그녀는 그에게 몸매를 보이는 것이 두려워 모두 거절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고운성과 그런 짓을 하지 않은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지금 그녀는 더욱 괴로울 것 같았다. 신이서는 송서림의 외투를 걸친 순간, 그의 냄새에 둘러싸여 옷과 맞닿은 피부가 모두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옷을 잡아당기자 옷깃에서 은은한 담배 냄새가 났다, 그 냄새를 맡으니 신이서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마치 안개라도 있는 것처럼 눈앞의 남자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생각이 복잡해지자 신이서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저는 먼저 방으로 갈게요. 제가 작은 방에서 잘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신이서는 횡설수설하며 폼이 남아도는 옷을 잡고 송서림을 지나쳐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신이서, 잘못 들어갔어." 그때, 송서림이 냉랭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직 익숙지 않아서. 안녕히 주무세요." 신이서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그 말을 들은 송서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한참을 가만히 서있던 송서림은 신이서의 긴 머리가 팔을 스치고 지나간 뒤에야 감전된 듯 짜릿한 느낌에 방금 전의 시각적 충격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렸다. 송서림이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신이서는 이미 방으로 돌아가 공기 속에는 은은한 샴푸 냄새만이 맴돌고 있었다. 신이서는 매번 그 촌티 나는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특별한 곳이 전혀 없는 못생긴 사람이라는 느낌을 줬는데 몸매가 저렇게 좋았다니. 가운을 입고 대놓고 꼬시는 것보다 잠옷을 입은 채 보일 듯 말 듯하게 애태우는 충격이 오히려 더 컸다. 뜨거운 열기는 신이서의 새하얀 피부를 감싸고 있어 불빛 아래에서 아우라를 가진 것 같았다. 분명 긴 잠옷 치마에 모두 가려졌지만 젖은 부분은 굴곡진 정체를 뽐냈다. 스쳐 지나간 것뿐이었지만 송서림은 당황했다. 그는 신이서를 신경 쓰고 싶지 않았지만 매번 그녀가 나타날 때마다 이상한 상황을 만들어 그럴 수 없게 만들었다. 그녀는 일부러 그러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방금 전, 당황한 그 모습은 연기 같지 않았다. 송서림이 의문에 잠긴 사이, 신이서가 다시 방문을 열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송서림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리고 역시 그녀가 순진한 척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녀도 송서림에게 접근했던 여자들처럼 거절하는 척하면서 그에게 수작질을 걸고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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