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그런데 권예진이 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정우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침대 옆으로 다가가 그녀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따뜻한 햇살이 흰색 커튼을 뚫고 들어와 방 안을 오렌지빛으로 물들였다.
그녀는 팔을 베고 잠들어 있었는데 칠흑같이 검은 긴 머리카락이 회색 베개 위에 흩어져 있었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 오뚝하고 예쁜 코, 촉촉한 붉은 입술이 참으로 매력적이었고 평온한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정우현은 깨우지 않고 이불을 살며시 덮어준 후 조용히 방을 나섰다.
...
자경 그룹 회의실.
공호열은 길고 힘 있는 손가락으로 펜을 돌리면서 멍한 표정으로 가운데 자리에 앉아 있었다. 딱히 화를 내지 않는데도 위엄이 느껴졌다.
임원진들은 대표의 안색이 좋지 않은 걸 보고는 작은 실수라도 저지를까 봐 아주 조심했다.
일정대로라면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해 논의하러 오늘 미국으로 가야 했지만 무슨 일인지 출장이 취소되었다.
공호열은 대형 스크린을 한 번 쳐다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면서 차갑게 말했다.
“다들 무슨 생각으로 출근하는 거죠? 머리를 장식으로 달고 다니세요?”
겁에 질린 사람들은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공호열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하를 호령하는 듯한 자세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삼진 그룹은 현재 5천억의 부채를 지고 있고 시장 가치도 고작 200억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쇠퇴기에 접어들어서 시장이 점차 축소되고 있고 정상적인 이윤조차 유지할 수 없어 업계 전체가 해체 위기에 놓여있어요. 누가 봐도 손해인데 이런 회사를 인수하자고요? 생각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아니면 머리가 어떻게 됐나요?”
“이런 형편없는 투자 계획안으로 대충 넘어가려 한다면 그럼 여러분의 월급도 대충 줘도 되나요? 자경 그룹은 다국적 기업이지, 자선 단체가 아닙니다. 자선 활동을 하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당장 꺼지세요.”
두 시간 정도 진행될 예정이었던 회의가 10분 만에 끝났다.
공호열이 오늘따라 심하게 화를 낸 바람에 임원진들은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회의실을 나갔다.
“권예진은 오아시스로 돌아갔어?”
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정민욱은 당황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아직 안 갔어요. 권예진 씨가 걱정되신다면 지금 사람을 보내서...”
“됐어. 언제 돌아가는지 지켜볼 거야. 그리고 누가 걱정한다고 그래? 걔 때문에 공씨 가문의 체면이 깎일까 봐 그러는 거지.”
공호열이 코웃음을 쳤고 눈빛도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검은색 벤틀리가 어둠 속을 가르며 천천히 별장에 들어섰다.
차가 멈추자마자 임길태가 재빨리 달려오더니 뒷좌석 문을 열고 공손하게 인사했다.
“도련님.”
공호열이 주변을 훑어보았지만 권예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임길태가 눈치채고 황급히 말했다.
“예진 씨 아직 들어오지 않았어요, 도련님.”
“누가 물었나요?”
공호열이 싸늘하게 호통쳤다.
“죄송합니다.”
그는 홀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서재로 향했다. 그 사이 임길태는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권예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 삐 소리 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휴대폰 너머로 기계 안내음이 흘러나왔다.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꺼져있었다.
임길태는 굳게 닫혀 있는 서재 문을 보면서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예진 씨가 밤늦도록 집에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돌아다니는 여자는 아닌 것 같았는데. 내가 사람을 잘못 봤나?’
밤이 점점 깊어졌고 칠흑 같은 어둠이 쏟아졌다. 별장 정원은 여전히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가끔 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밤 11시가 넘었지만 권예진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공호열이 일을 마무리하고 서재에서 나오자 임길태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도련님, 예진 씨가 아직도 들어오지 않았어요. 시간이 늦었고 길도 익숙지 않을 텐데. 위험한 일이라도 당한 건 아니겠죠? 사람을 보내서...”
“필요 없어요.”
공호열은 임길태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깊은 눈동자에 걷잡을 수 없는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임길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공호열이 위층으로 올라간 다음 다시 휴대폰을 꺼내 권예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여전히 꺼져있었다.
...
블루 베이.
권예진이 천천히 눈을 떴다. 스탠드의 희미한 불빛을 통해 주변 환경을 확인한 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망했다.’
약을 바르고 잠깐 눈을 붙이려 했는데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커튼을 걷자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과 도시의 불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늦었어?’
서둘러 일어나 휴대폰을 찾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침대 옆 옷걸이에 G사의 똑같은 새 옷이 걸려 있었다.
권예진은 간단히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거실로 나갔다. 불을 켜보니 정우현이 옷을 입은 채로 소파에서 자고 있었다.
잠귀가 밝은 정우현은 발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깨어났다. 소파에서 일어나 가까운 곳에 서 있는 권예진을 보면서 물었다.
“배 안 고파? 주방에 죽이 있는데 데워줄게.”
“괜찮아. 왜 방에서 자지 않고 여기서 자?”
“네가 어디에 사는지 알려주지 않아서 몰래 도망갈까 봐 그랬지.”
정우현은 장난기 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는 슬리퍼를 신고 주방으로 향했다. 그 모습에 권예진이 다급하게 말했다.
“시간 없어. 얼른 들어가 봐야 해.”
그녀는 바로 택시를 타고 오아시스로 돌아갔다.
아무도 깨지 않게 몰래 방으로 들어가려고 조심스럽게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그런데 그때 임길태가 다가왔다.
“예진 씨, 드디어 들어왔군요. 걱정돼서 밤새 한숨도 못 잤어요. 무슨 일 있었어요? 왜 이제야 들어온 거예요?”
권예진의 얼굴에 난감하고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고 두 눈에는 긴장감과 두려움이 감돌았다.
공호열 생각만 하면 마음이 불안하여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죄송해요, 집사님. 일이 좀 생겨서 휴대폰을 잃어버린 바람에 제때 연락하지 못했어요. 호열 씨... 화 많이 났나요?”
임길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진 씨, 도련님과 결혼할 생각이라면 되도록 도련님의 심기를 건드리지 마세요. 안 그래도 시간을 들여서 감정을 키워야 하는데 자꾸 이렇게 싸우면 좋을 게 없어요. 그리고 도련님 심기가 불편하면 결국 예진 씨만 고생하게 돼요. 지금 도련님 기분이 좋지 않으니까 이따가 꼭 말조심해요.”
“알겠어요. 고마워요, 집사님. 꼭 조심할게요.”
나지막하게 대답하던 권예진은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