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권예진이 덤덤하게 말했다.
“할아버지께 드리려고 사 온 거예요.”
누가 감히 공한무를 거지라고 하겠는가?
그 말에 온혜영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다른 사람들도 권예진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고 함부로 달려들지 않았다.
권예진이 말을 이었다.
“이 집안에 차가 부족하지 않다는 건 알지만 이 차는 할아버지의 병환에 맞춰 배합한 차라 마시면 도움이 될 거예요. 그리고 저희가 왜 이렇게 늦게 왔냐면...”
그녀는 하던 말을 멈추고 옆에 선 공호열을 힐끗 보고는 수줍게 웃었다.
“어젯밤에 오아시스에서 밤을 보냈는데 호열 씨가 너무 힘들게 해서 늦잠을 잤어요.”
그 순간 사람들 모두 멍해졌고 공호열은 충격받은 듯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담하고 가냘픈 권예진을 쳐다보았다. 매처럼 날카로운 눈빛에 섬뜩한 기운이 서서히 감돌았다.
‘정말 뻔뻔하기 짝이 없는 여자야. 못 하는 말이 없어.’
“호열아.”
바로 그때 귀티와 우아함이 몸에 밴 한 여자가 다가왔다. 딱 봐도 관리를 아주 잘 받은 듯했다.
그녀를 보자 공호열의 표정이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어머니, 언제 돌아오셨어요? 말씀이라도 해주시지. 그럼 공항에 마중 나갔을 텐데.”
연정란이 아들을 흘겨보며 말했다.
“어제 아버님의 상태가 안 좋으시다는 전화를 받고 바로 티켓 끊어서 왔어. 네가 일이 바쁠까 봐 연락 안 했지. 근데 일만 바쁜 게 아니라 밤 생활도 아주 화려하구나.”
그녀는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모두 들었다. 저렇게 먼저 들이대는 여자를 며느리로 들이고 싶지 않았다.
권예진은 미래 시어머니가 그녀의 허풍을 들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화끈거렸고 너무도 후회되었다.
온몸이 굳어버린 채 주먹을 꽉 쥐었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공호열이 가볍게 웃더니 다정하게 말했다.
“어머니, 제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세요? 제가 알아서 잘 처리할게요.”
연정란은 아들을 보면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당연히 잘 알지. 근데 혹시나 딴마음을 품고 수작을 부리는 사람이 있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
공호열이 거짓말을 까발리지 않자 권예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이 상황에 미래의 시어머니에게 먼저 인사를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그때 백발이 성성한 최애순이 다가왔다.
그녀는 권예진의 손을 잡고 따뜻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가, 어서 와.”
“어르신.”
권예진이 깍듯하게 인사했다. 어제 공한무의 목숨을 담보로 혼인을 강요했던 일이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찻잎을 든 손을 꽉 쥐었다.
“긴장하지 마.”
최애순이 그녀의 손등을 토닥였다.
“우리 어제 만났었지. 난 호열이 할머니니까 앞으로는 네 할머니기도 해. 그러니까 할머니라 불러. 할아버지 깨어나셨어. 너희를 보고 싶으시대.”
“고마워요, 할머니.”
마음이 따뜻해진 권예진은 들고 있던 찻잎을 건넸다.
“할아버지께 드리려고 산 차예요. 매일 두 잔씩 마시면 할아버지 병에 도움이 될 거예요.”
“그래. 마음 씀씀이가 예쁘구나.”
최애순은 웃으며 차를 받았다.
“할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시니 얼른 들어가 봐.”
그때 온혜영이 옆에서 빈정거렸다.
“마음 씀씀이가 이쁜 건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지 누가 알겠어요.”
공호열이 할아버지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자 권예진은 재빨리 그를 따라갔다.
두 사람이 나란히 공한무의 방으로 걸어가는 동안 공호열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힘들게 해서 늦잠을 잤다고?”
움찔한 그녀를 본 공호열의 얼굴에 비웃음이 스쳤다.
“생각보다 똑똑하네. 근데 나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거실에 있던 사람들은 귓속말을 주고받는 두 사람을 보며 각자 다른 생각을 했다.
온혜영은 다른 방으로 들어가 휴대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
그 시각 병원.
장옥영이 포장된 음식을 들고 김다윤의 병실로 들어갔다.
김다윤이 침대에 기대앉아 게임하고 있었는데 장옥영이 음식을 차린 후에야 휴대폰을 놓더니 상 위의 음식을 보면서 툴툴거렸다.
“뭐가 다 이렇게 담백해요? 딱 봐도 맛없어 보이잖아요.”
짝.
화가 난 장옥영이 김다윤의 등을 두어 번 때렸지만 그리 세게 때리진 않았다. 그녀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먹을 것만 생각하고 있어? 방금 혜영이한테서 전화 왔어.”
“혜영 아주머니가 뭐라 하던가요?”
김다윤이 급히 묻자 장옥영이 화를 내며 말했다.
“권예진 그 빌어먹을 년이 그럴듯하게 차려입고 공씨 가문에 갔대. 게다가 호열이랑 사랑싸움도 하더래.”
“말도 안 돼요.”
김다윤은 전혀 믿지 않았다.
“겨우 하루 만에 호열 씨가 촌뜨기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요.”
장옥영이 말했다.
“사실이든 아니든 같이 있는 밤이 길어지면 너한테 좋을 거 없어. 무슨 수를 써서든 그 집에서 내보내야 해.”
장옥영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다행히 네가 순발력이 좋아서 이번에 꼬투리 잡히지 않았어. 오히려 역공까지 했고. 호열이가 널 얼마나 예뻐하는데 걔를 가만둘 리가 있겠어? 사랑싸움은 무슨. 혜영이가 잘못 본 거겠지.”
“혜영 아주머니가 잘못 봤을 거예요. 호열 씨도 나중에 나한테 확실하게 설명해주겠다고 했어요.”
장옥영이 김다윤의 이마를 톡 쳤다.
“너도 참. 그러게 왜 딴 남자를 만나 만나길.”
그러자 김다윤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호열 씨가 날 건드리지 않는단 말이에요. 다른 건 몰라도 한빈이가 얼굴이 반반하긴 하잖아요.”
장옥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자식 이름은 꺼내지도 마. 남자는 돈 빼면 시체야. 호열이가 너한테 사람 붙여줬으니까 각별히 조심하고. 지금 당장 그 자식한테 전화해서 당분간 만나지 말자고 해.”
“엄마가 말하지 않아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어요.”
김다윤도 같은 생각이었던지라 바로 휴대폰을 꺼내 성한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금방 연결되었다.
“자기야, 왜 이제야 전화해. 공호열 그 자식이 널 의심하는 건 아니지?”
김다윤이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그럴 리가. 오히려 날 지켜주겠다고 사람도 붙여줬고 블랙카드까지 줬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당분간은 만나지 말자.”
블랙카드라는 말에 성한빈의 눈이 번뜩였다.
“그래. 네 말대로 할게. 공호열 그 자식 어찌나 세게 걷어찼는지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 블랙카드를 줬다니까 내 병원비는 걱정 없겠어.”
“알았어. 400만 원 보내줄게.”
“겨우 400만 원? 적어도 2천만 원은 줘야지.”
성한빈이 능글맞게 웃었다.
“내가 몸보신 잘하면 너한테도 좋잖아.”
“됐어. 2천만 원 줄게, 그럼.”
김다윤이 짜증을 내며 전화를 끊었다.
공호열이 준 블랙카드는 한도가 없었기에 2천만 원은 푼돈에 불과했다.
...
권예진이 먼저 공한무의 방에서 나왔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단둘이 할 얘기가 있다고 해서 공호열은 계속 방에 있었다.
그녀가 나오는 걸 본 온혜영은 형님이자 공호열의 큰어머니인 장영희를 툭툭 쳤다.
그 뜻을 바로 알아들은 장영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권예진에게 다가갔다.
“예진 씨, 아버님 상태는 좀 어떠셔?”
“상태는 아주 좋으세요. 치료만 계속 잘 받으시면 될 것 같아요.”
권예진이 웃으며 말했다.
“정말 다행이야. 이게 다 예진 씨 덕분이야. 우리 호열이 참 복도 많지. 예진 씨처럼 실력 좋은 의사랑 결혼하다니.”
장영희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호열이는 이따가 나올 것 같은데 카드게임 하지 않을래? 마침 세 명이라 한 명이 모자라거든.”
권예진이 황급히 말했다.
“저 카드게임 할 줄 몰라요, 큰어머니...”
“할 줄 몰라도 괜찮아. 우리가 가르쳐줄게.”
그녀가 말을 하기도 전에 장영희는 그녀의 손을 잡고 테이블 앞으로 데려갔다.
“예진 씨는 머리가 좋아서 금방 배울 거야.”
온혜영과 연정란도 옆에 있었다. 권예진은 그제야 미래의 시어머니를 제대로 살펴보았다.
관리를 꾸준히 잘해온 티가 났고 정교한 메이크업을 하고 있었다. 인상이 부드럽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거리감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