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오늘은 그냥 자요
그 순간, 마치 벼락을 맞은 듯 하윤슬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사실 멍해진 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곁에서 그 대화를 지켜보던 비서 또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수년 동안 강태훈 곁에서 일해 오며 수많은 지시를 들어왔지만 여자를 위한 물건을 사 오라는 지시는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그 의미는 분명했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간단한 대화가 끝나자마자 하윤슬의 얼굴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하지만 강태훈 앞에서 허둥대거나 당황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기에 그녀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사실, 그녀는 이미 마음의 정리를 끝낸 상태였다. 이 제안을 받아들인 건 결국 자신의 선택이었고 더는 수줍은 척하거나 망설이는 모습은 불필요했다. 괜한 망설임은 오히려 그가 흥미를 잃게 만들 수도 있었다.
애초에 자신은 남자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고리타분한 체면이나 자존심은 돈과 권력 앞에서 아무 쓸모도 없는 허울뿐이었다
이 관계는 어디까지나 철저히 ‘합의된 관계’였다. 지금 그녀에게 중요한 건 단 하나, 강태훈의 관심을 잃지 않고 그의 곁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래야 당분간은 병원비 걱정 없이 지낼 수 있고 그의 옆에서 일하며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니까.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마음을 다잡았지만 막상 샤워를 마치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침대에 눕자 온몸에 긴장이 몰려왔다.
한편, 화상회의를 마치고 무심히 침실 문을 연 강태훈은 문을 열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침대 한쪽에 하윤슬이 그의 잠옷을 걸친 채 조용히 누워 있었고 헐렁한 옷 사이로 드러난 희고 매끄러운 피부와 곧게 뻗은 다리가 불빛에 따라 아찔하게 시선을 자극했다.
그 모습을 보고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호히 마음을 억눌렀다.
적어도 오늘 밤만큼은 아니었다.
“하윤슬 씨.”
“네.”
“아까 하영 그룹 프로젝트에서 수정이 필요한 부분, 내가 다 표시해 뒀어요. 내일 검토해 보고 모르는 부분 있으면 다시 물어봐요. 오늘은 이만 자죠.”
“지금 그럼... 그걸 하시려던 게 아니에요?”
“오늘은 안 해요.”
강태훈은 반대편에서 이불을 들추고 조용히 몸을 눕힌 뒤,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천천히,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피곤하니까 불 꺼요.”
그녀는 분명 오늘 밤은 뜬눈으로 지새우게 될 거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깊은 잠에 빠졌고 눈을 떴을 땐 벌써 아침 7시였다.
낯선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이 번쩍 들며 벌떡 일어났다. 본능적으로 옆자리를 확인하자, 푹 꺼진 베개가 누군가가 분명 이곳에서 함께 잤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서둘러 씻고 침실을 빠져나온 그녀는 처음으로 이 집을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곳은 시내 중심에서도 손꼽히는 고급 주택가에 위치해 있었고 삼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어디서든 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TV에서 보던 황금빛 궁전 같은 호화스러운 집을 상상했지만 의외로 실내는 블랙과 화이트 톤의 절제된 미니멀 인테리어였고 널찍한 거실은 오히려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뭐,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지. 강태훈 씨 자체가 차갑고 냉정한 얼음 같은 사람이니까.’
그때, 부엌 쪽에서 은은하게 퍼지는 향긋한 냄새가 그녀의 후각을 자극했다.
‘아, 집에 도우미 아주머니가 계신가 보네.’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레 부엌 쪽으로 다가간 그녀는 그곳에서 직접 요리를 하고 있는 강태훈의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직접 요리하세요?”
발소리를 들은 강태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아침 다 됐으니까, 나가서 그릇 좀 놔요.”
하윤슬은 여전히 놀란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강태훈은 잠시 시선을 떼지 않다가 짧게 한마디 덧붙였다.
“난 낯선 사람이 내 집 안에 들어오는 걸 싫어해요. 도우미도 마찬가지고요.”
그녀는 머쓱한 듯 작게 웃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음식도 직접 해서 드실 줄은 몰랐어요...”
하지만 정작 그녀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따로였다.
그렇게 냉정할 줄만 알았는데 막상 가까이서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