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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지금은 근무 시간

그날 밤, 하윤슬은 겨우 세 시간 남짓 눈을 붙였을 뿐이었다. 천근만근 무거운 몸으로 눈을 떴을 땐 이미 강태훈은 보이지 않았다. 식탁 위에는 그가 미리 준비해 두고 간 따뜻한 아침 식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그 옆엔 짤막한 메모 한 장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출장 갔다 올게요.] 하윤슬은 그 쪽지를 손에 들고 한참을 바라보다가, 다시 조용히 식사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회사에서 보여주는 그의 냉정하고 차가운 모습과 집에서의 다정한 태도는 너무나 달라 마치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특히 그의 쇄골에 새겨진 문신만 아니라면 그가 자신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진 건 아닐까 착각할 뻔하기도 했다. 그 순간, 그녀의 마음 한편이 저릿하게 아려왔고 강태훈이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는 그 여인이 문득 부러워졌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그 여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속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렇게 복잡한 마음을 안고 출근한 하윤슬은 아침 회의를 마치자마자 곧장 대출 신청서 작성에 돌입했다. 오전 내내 몰두한 끝에 점심 무렵이 되어갈 무렵, 회의실 문이 벌컥 열리며 진성호가 험악한 표정으로 들어섰다. “하윤슬 씨, 본사에 협조 대출 신청할 생각이라니... 지금 제정신이야? 우리 3팀이 얼마 전에 무슨 사고 쳤는지 잊었어? 이런 상황에 본사가 대출 승인을 해줄 것 같아?” 그러나 하윤슬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단호하게 답했다. “승인될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녀는 어젯밤, 강태훈과의 대화를 통해 그 힌트를 얻었다. 이제 둘 사이에 일어난 일까지 생각하면,이 정도 부탁쯤은 들어줄 거라 믿고 있었고, 무엇보다 그 역시 그녀가 이 프로젝트에 얼마나 절실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진성호는 그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고민 끝에 내놓은 방안이라는 건 알겠어. 예전보다 성장한 것도 맞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가능성은 희박해. 하영 그룹 프로젝트 자체가 리스크가 큰 건 사실이잖아.” “그렇지만 지금으로선 이 방법이 가장 빠르게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에요. 과장님, 이번 한 번만 믿어주세요. 제발요.” 사실 진성호보다 그녀가 훨씬 더 절박했다. 이번 프로젝트만 성공하면 강태훈에게 빌린 돈도 올해 안으로 모두 갚을 수 있었다. 잠시 그녀의 간절한 눈빛을 바라보던 진성호는 뭔가를 눈치챈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수많은 사람을 겪어온 그는 그녀의 미묘한 변화를 어렴풋이 감지할 수 있었다. “그래. 한 번 믿어볼게. 잘 해봐. 다음 프로젝트는 이거보다 훨씬 더 클지도 모르니까.” “정말요? 감사합니다, 과장님!” 하윤슬은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배웅했고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잠시 고민하더니 결국 핸드폰을 꺼내 강태훈의 번호로 메시지를 보냈다. [신청서 제출했어요.] 잠시 망설이던 손끝이 다시 움직였다. [비행기 타셨나요? 무사히 도착하시길 바라요.] 그렇게 메시지를 보내고 한참이 지나서야 도착한 그의 회신은 단 세 글자였다. [바빠요.] 그녀는 그 메시지를 바라보다가 이내 말없이 삭제했고 휴대폰을 서랍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래, 이번 프로젝트만 시작되면 3팀 실적이 단번에 반등할 거야. 그렇게 되면 다음 프로젝트도 분명 내 손에 들어오겠지.’ 성과급은 물론이고 기본급에 인센티브까지 더해지면 어머니 병원비도 강태훈의 도움 없이 해결할 수 있었다. 그 생각에 그녀의 가슴 한편에 오랜만에 삶의 희망이 피어올랐다. 희망이 생긴 순간부터 하윤슬은 전보다 몇 배 더 열정적으로 일에 몰입했다. 강태훈이 출장을 떠난 며칠 동안, 밤늦도록 야근을 하고도 어머니를 간병하러 병원에 가는 일이 전혀 힘들지 않았다. 그녀가 아침마다 출근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하나였다. 바로 본사에서 온 메일함을 확인하는 것. 그리고 마침내, 신청서를 보낸 지 나흘째 되는 날 아침, 드디어 본사의 회신 메일이 도착했다. 떨리는 손으로 메일을 열자, 제목에는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신청 승인 불가] 하윤슬은 멍한 눈빛으로 한참을 화면만 바라보다가 이내 황급히 휴대폰을 꺼내 강태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마침내 연결된 그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차가웠다. “무슨 일이죠?” “하영 그룹 프로젝트 대출 신청서요. 왜 승인되지 않은 거죠?” 잠시 정적이 흘렀고 강태훈의 목소리는 더욱 낮고 딱딱하게 이어졌다. “이사회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한 결과, 리스크가 너무 크다는 결론이 나왔어요.” “하지만...” “하윤슬 씨.” 그의 말투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그의 말끝은 묘하게 서늘했다. “지금은 근무 시간이에요. 다른 볼일 없으시면, 끊겠습니다.” 뚝. 전화는 단호하게, 아무 여운도 남기지 않은 채 그렇게 끝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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