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레이만 별장의 명의가 바뀌려면 시간이 어느 정도 걸려야 하기에 이하음은 일단 진태하를 자신의 집에 데려가기로 했다.
이운해 부부는 이석범의 건강이 안 좋아진 뒤로 줄곧 본가에 남아 그를 보살펴 주고 있었다.
“엄마, 아빠,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요.”
이하음이 차창을 내리며 손을 흔들었다.
이운해는 이에 똑같이 손을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고 한영애는 운전석을 보며 주설아에게 당부했다.
“설아야, 운전 조심해.”
주설아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제 운전 실력 잘 아시잖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한영애는 뒤늦게 주설아의 얼굴에 난 상처를 발견하고는 뭐라 물으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을 꺼내기도 전에 주설아가 시동을 켜고 차량을 출발시켜 버렸다.
이운해는 한영애의 얼굴이 심각해진 것을 보고 옆으로 다가가 물었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가 너무 과민 반응하는 걸 수도 있죠.”
이운해는 대수롭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보다 당신은 이번 일 어떻게 생각해?”
“당신이 아버님 안목을 조금이라도 닮았어도 아주버님 앞에서 이 정도로 기를 못 펴지는 않았을 거예요.”
한영애가 무서운 눈으로 이운해를 째려보았다.
“당신, 다음에 태하 만나면 내 체면도 좀 세워줘. 당신 앞에만 서면 구박데기가 된 기분이야.”
“이혜정이 우리 하음이한테 그딴 말을 지껄였는데도 제대로 된 한마디 못 해주면서 지금 체면을 세워달라는 거예요?”
이운해는 그 말에 금방 다시 입을 다물었다.
“조만간 김태원 명의님께서 강주시로 돌아오신다고 하니까 아버님 건강 좀 봐달라고 당신이 부탁드려 봐요.”
한영애는 말을 마친 후 홀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
강주시 근교, 강북도.
이곳 강북도에는 총 4개의 큰 공업 단지가 있고 매개 단지에는 열댓 개의 회사가 즐비해 있다.
이씨 가문에는 총 두 개의 중견 기업 있는데 하나는 이운해가 대표로 있는 화양 테크고 다른 하나는 이운산이 대표로 있는 화성 테크다.
화양 테크는 반도체 생산을 메인으로 하는 회사고 화성 테크는 휴대폰을 생산하는 회사로 두 회사의 회장은 모두 이석범이다.
제3 공업 단지에 있는 화양 테크의 자회사에는 현재 100여 명의 직원이 있고 자회사의 총책임자는 이하음이다.
주설아는 공업 단지 앞에 차를 세운 후 이하음을 바라보며 물었다.
“네 남자 친구한테 회사 구경 안 시켜줄 거야?”
이하음은 그 말에 룸미러로 진태하를 바라보았다. 진태하가 고개를 떨군 채 자고 있는 걸 확인한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늘은 집으로 데려가 쉬게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주설아는 그 말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짓더니 이하음의 팔을 툭 치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가는 길에 편의점 잠깐 들를까?”
“편의점? 나 뭐 살 거 없는데?”
“정말 없어? 젊은 남녀가 한 지붕 아래에서 함께 자게 될 텐데 정말 없어?”
이하음은 주설아의 말에 그제야 뭔 뜻인지 깨닫고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나 놀리니까 아주 재밌어 죽겠지? 그치? 이제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주설아는 그 말에 실실 웃으며 손으로 뒷좌석을 가리켰다.
“하지만 한침대에서 자야 하는 건 맞잖아. 너희 집에는 침대가 하나밖에 없으니까. 그렇다고 약혼자를 소파에서 재울 거야?”
“내, 내가 소파에서 자면 되지!”
이하음은 버벅거리며 답을 하고는 차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집에 남자를 들이는 건 그녀도 처음이나 조금 당황한 모양이었다.
주설아는 그런 친구의 모습에 피식 웃더니 이내 시동을 다시 켜며 이하음의 집으로 향했다.
주차를 마친 후, 주설아는 차 키를 이하음에게 건네주더니 조금 슬픈 표정을 지었다.
“너를 지켜주는 일도 오늘로써 끝이네. 네 약혼자가 나만큼이나 너를 아끼고 사랑해 주기를 바라고 또 바랄게.”
“무슨 쓸데없는 소리야. 그리고 키는 왜 줘? 집까지 걸어가려고? 내일 아침 늦지 않게 나 데리러 와.”
이하음은 주설아가 건넨 차 키를 거들떠보지 않은 채 차 문을 열고 내렸다. 그러고는 뒷좌석으로 가 진태하의 팔을 콕콕 찔렀다.
“여긴 어디예요?”
진태하가 몽롱한 눈으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저희 집이에요.”
“와... 엄청 높네요?”
진태하는 20여 층의 아파트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잔뜩 흥분한 얼굴로 물었다.
“이 아파트 전체가 다 하음 씨 거예요? 그럼 우리는 앞으로 매달 나오는 월세만 받아먹고 살아도 되겠네요?”
“네? 푸핫. 이거 내 거 아니에요. 나도 여기 월세로 살고 있는 것뿐이에요.”
이하음이 피식 웃으며 답해주었다.
“아... 그런 거예요? 월세 받으면서 사는 게 꿈이었는데, 아쉽네요.”
주설아는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진태하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참, 진태하 씨 스승님 말이에요. 엄청 대단한 분이시죠?”
“당연하죠.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분이세요!”
“그럼 돈도 엄청 많겠네요?”
주설아가 일부러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진태하가 대단한 사람인 건 맞지만 허풍도 잘 떠는 듯해 일부러 놀리려는 것이었다.
“어... 제 스승님은 물욕이 별로 없으세요. 돈이 들어오게 되면 전부 학교를 짓는 것에만 투자하시거든요. 그래서 저한테도 고작 만2천 원 정도밖에 안 주셨어요.”
주설아는 그 말에 천원산 근처 도로에서 진태하가 잔뜩 구겨진 돈을 꺼냈던 것이 생각났다.
‘뭐, 이 남자라면 돈을 버는 것 정도는 매우 쉬울 테니까.’
주설아를 보낸 후 이하음은 진태하와 함께 집으로 올라왔다.
21평 남짓의 작은 집이지만 있을 건 다 있었다.
킹사이즈 침대 위에는 흰색 털을 가진 곰 인형이 놓여있었고 통창 앞에는 빨래 건조대가 있었다.
그리고 그 빨래 건조대 위에는 상의 몇 개와 핑크색 속옷이 대놓고 걸려있었다.
진태하는 서둘러 시선을 거두어들이고는 헛기침했다.
“실내화를 따로 준비 못 했어요. 일단은 내 거 신어요.”
이하음은 진태하의 앞에 실내화를 내려놓았다가 갑자기 얼굴이 빨개진 그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왜 얼굴이... 헉!’
그녀는 그제야 뭔가가 떠오른 듯 얼른 빨래 건조대로 가 옷들을 옷장에 집어넣었다.
진태하는 흙이 여기저기 묻은 신발을 벗은 후 이하음의 실내화를 신었다. 사이즈가 맞지 않은 탓에 실내화가 잔뜩 구겨져 버렸다.
진태하는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온 건 처음이라 조금 긴장한 건지 소파에 앉은 후에도 여전히 손과 발을 꼼지락거렸다.
그때 이하음이 시원한 물을 들고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물... 마셔요.”
그녀 역시 긴장한 건 매한가지였다. 진태하와 결혼하겠다는 말에 입 밖으로 내뱉을 때보다 더 긴장되는 듯했다.
진태하는 컵을 쥐고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이하음은 잔뜩 경직된 채 진태하의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분위기는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때 타이밍 좋게 이하음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잠깐... 전화 좀 받을게요.”
이하음이 조금 어색한 말투로 말했다.
진태하는 고개를 끄덕인 후 주머니에서 옛날 폴더폰을 꺼냈다. 연락처를 한번 훑어보니 거기에는 이상한 이름들이 가득했다.
모래성 황태자, 섬나라 사신, D국 도살꾼, Y국 여왕 등등, 비슷한 느낌의 이름이 백 개는 족히 넘었다.
한편 이하음은 휴대폰을 집어 든 후 발신자를 보더니 바로 미간을 찌푸리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하지만 끊은 지 2초도 안 돼 또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이에 이하음은 휴대폰을 진태하에게 건네주고는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저 대신 전화 좀 받아주실래요? 저 없다고 하시면 돼요.”
진태하는 [황천우]라는 이름을 보더니 알겠다며 전화를 받았다.
“하음 씨, 드디어 제 전화 받으시네요? 오늘 저녁에 파티가 하나 있는데 나랑 같이 가줄래요?”
“미안한데 하음 씨 지금 자요.”
진태하의 담담한 한마디에 이하음은 바로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그, 그냥 나 없다고 하면 되는데...’
“너 이 새끼 누구야! 하음 씨 전화를 왜 네가 받아?!”
전화기 너머로 남자의 분노에 찬 외침이 들려왔다.
진태하는 피식 웃더니 한결 더 여유로운 목소리로 답했다.
“딱 보면 감이 안 잡히나? 당연히 하음 씨 남편이지 누구겠어. 하음 씨는 임자 있는 몸이니까 그만 치근덕거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