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6장 원수지간
박지환의 안색은 더욱 어두컴컴해졌다.
“내가 남자가 아니면 지금 내가 하는 짓이 뭔데?”
민서희도 감정에 통제력을 잃었다.
“짐승이에요! 날 싫어한다면 서요? 호진은을 사랑한다면서요? 나한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걸 호진은이 알면 감정에 배신당했다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입 다물어!”
박지환은 경고를 하듯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
“이 일을 호진은 씨한테 한마디라도 언급하면 절대 가만두지 않아!”
“...”
마음이 식어버린 민서희는 눈물을 흘리며 빈정거렸다.
“나를 막으려고 하지 말고 당신 스스로나 잘 다스리세요. 이런 건 스스로 욕망을 통제해야 되는 거니까요.”
“다시 말해 당신의 남성 본능이 그러하다는 의미예요.”
민서희의 눈물을 보자 의외로 짜증이 난 박지환은 그녀를 풀어주었고 술기운이 반쯤 가시자 자신이 여기에 왔다는 게 후회스러웠다.
설령 오더라도 자신을 불편하게 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술은 이미 마셨고 돌아갈 필요도 없으니 그는 아예 다른 침대에 이부자리를 펴고 누웠다.
지금 상태로 잠에 들지 못할 줄 알았던 그는 익숙한 냄새에 졸음이 쏟아졌다.
민서희는 경악을 금치 못하며 한참 멍을 때리다 이내 마음이 차가워지고 있다는 기분밖에 들지 않았다.
처음에는 좀 망설여졌다면 지금은 박지환의 마음속에 그녀가 없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호진은의 존재로 그녀를 화나게 하려는 목적이든 아니든 박지환한테 있어서 그는 그저 원수일 뿐이었다.
심지어 박지환이 여기에 있으니 중기도 밤을 지키러 오지 않았고 이 순간이 바로 그녀가 탈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모든 생각을 정리한 민서희는 눈물을 닦은 뒤 조심스레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다 떠나기 전 그녀는 박지환을 한번 되돌아보고 마음을 굳히며 문을 닫았다.
노선에 익숙한 그녀는 안전 통로로 향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다 보니 그녀의 몸에는 땀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임신한 몸으로 운동에 무리를 하면 안 되니 그녀는 쉬었다 걸었다를 반복하며 발을 내딛고 있었다.
그렇게 일 층에 도착한 그녀는 밖으로 나가 택시를 잡았다.
허나 목적지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처음에는 유일하게 부탁할 수 있는 양호준을 찾으러 동진으로 가려고 했는데 동진으로 가려면 수속이 필요하니 그것마저도 다 박지환의 손에 들려있었다.
“아가씨, 앉아 놓고 왜 어디로 가는지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민서희는 난처한 표정으로 사과를 한 후 택시에서 내렸다.
어두운 불빛 아래에 그녀는 방향을 분간할 수 없었다.
지금 그녀는 어디 의지할 사람도 없으니 눈앞의 길을 볼 수만 있었더라도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 친절한 택시 기사는 화를 내거나 자리를 떠나지 않고 목을 내밀어 물었다.
“한밤중에 어디 가는데 내리면 어떡해요? 혹시 눈이 잘 안 보여요? 혼자 밖에 있으면 위험하니까 얼른 타요. 집으로 데려다 드릴게요. 집이 어디예요?”
민서희는 얼떨떨해졌다.
“집이요? 저는... 집이 없어요.”
택시 기사는 예상외의 답을 듣게 되었다.
“외지에서 오셨구나... 월세집도 없어요?”
민서희는 고개를 흔들며 자신을 불쌍하게 보이게 했다.
“남자... 한테 사기를 당했어요. 여기에 와서 같이 생활하자고 약속해 놓고 곧바로 다른 여자한테 정신이 팔려버리는 바람에 저는 지금 오갈 데가 없는 사람이 돼버렸어요.”
“남자도 아니네! 우리 딸아이랑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데 그럼 그 놈도 스무 살을 좀 넘겼겠네요. 어린 나이에 이렇게 책임을 짊어질 줄 몰라서야 어떡해요! 빌어먹을 놈!”
택시 기사의 꾸짖음에 속이 시원해진 민서희는 미소를 지었다.
택시 기사가 물었다.
“혹시 신분증 있어요?”
여러모로 아는 길들이 많은 택시 기사의 도움을 받으려고 민서희는 일부러 한탄을 널어놓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