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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소이현은 강도훈의 뒷모습을 보면서 옆으로 늘어뜨린 손을 파르르 떨었다. 이혼 얘기를 먼저 꺼낸 건 강도훈이었고 이젠 또 본가로 오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한 뒤 그냥 휙 가버렸다. 그녀가 거절할 리 없다고 확신하는 듯했다. 강도훈의 눈에 그녀는 부를 때면 언제든지 달려오고 쉽게 부릴 수 있는 그런 존재에 불과했다. 소이현은 마음속의 감정을 해소하려고 심호흡했다. 그나저나 더 큰 문제는 본가에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였다. 강민호가 본가에 있어 가지 않으면 분명 이런저런 생각을 할 터. 하지만 이혼 서류에 사인까지 한 지금은 정말 가고 싶지 않았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던 그때 박지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이현아, 일단 룸에서 내가 연락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이따가 아주 대단한 분을 소개해줄게.” 소이현은 본가에 돌아갈지 여부에 대한 고민을 잠시 접어두고 그녀에게 물었다. “대단한 분? 누군데?”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박지연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서울의 재벌이야.” 사업을 시작한 후로 박지연도 큰 행사에 많이 참석했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까지 흥분할 정도라면 일반 재벌은 아닌 게 분명했다. 소이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가도 되는 자리야?” 박지연이 답했다. “당연하지. 다들 과학기술 업계의 인사들이고 업적이 아주 대단해. 해외에서 불과 몇 년 만에 여러 대륙의 시장을 개척했고 사업을 20개국 이상으로 확장했어. 우리 분야와도 관련이 있으니 당연히 가야지.” 이 정도 경력이라면 포브스 부자 순위에도 오를 만한 대단한 인물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소이현은 박지연에게서 이렇게 대단한 서울권 인사와 친분이 있다고 얘기한 걸 들은 적이 없었다. 박지연이 설명했다. “내 초등학교 동창 중에 이분과 함께 일하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 덕분에 만날 수 있게 된 거야. 아니면 나도 못 가.” “초등학교 동창? 평소 연락하는 사이야?” “걔가 SNS에 근황을 올린 걸 보고 염치 불고하고 그 사람의 근황에 대해 물었는데 꽤 친절하게 정보를 알려주는 거 있지? 두어 마디 나눠보니까 내가 꼭 만나서 잘 보여야 하는 사람이더라고. 더 놀라운 건 이분이 오늘 이 경기장에 왔대. 이건 하늘이 준 기회야. 오늘 안 만나면 언제 또 기회 있을지 몰라. 설령 아무 말도 못 하더라도 얼굴이라도 비추고 와야지.” 소이현이 아무 말이 없자 박지연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알아챘다. “너처럼 기술 있는 사람은 이해 못 하겠지만 사업은 얼굴에 철판 깔고 해야 하는 거야. 이따가 연락할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부르면 바로 와.” 그러고는 전화를 끊었다. 이 약속은 아무래도 미룰 수 없을 듯했다. VIP 룸에서 15분 정도 기다렸을 무렵 소이현은 연락을 받았다. 박지연이 도착했고 잠시 화장실에 들렀다고 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소이현은 화장실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손을 씻으러 들어갔는데 뜻밖에도 강지유와 마주쳤다. 강도훈이 왔으니 강지유가 따라온 것도 당연했다. 게다가 강지유는 재벌가의 순종적인 아가씨가 아니었다. 모험을 즐기고 짜릿함을 추구하는 그녀는 오래전부터 레이싱을 좋아했다. 하지만 너무 위험하다는 이유로 가족들이 반대한 바람에 대신 각종 최고급 슈퍼카를 수집하게 되었다. 강지유는 개인 자동차 전시회도 열었다. 그때 인천 상류 사회의 젊은 남녀들도 구경하러 왔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소이현과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녀는 강지유를 무시하고 손을 씻는 데 집중했다. 강지유는 이곳에서 소이현을 만날 줄은 몰랐고 무시당할 줄은 더더욱 몰랐다. 놀라긴 했으나 화를 내진 않고 소이현의 옆에 있는 세면대로 다가가 수도꼭지를 틀고 손을 씻으며 물었다. “이따가 연서 언니 경기하는데 기분이 어때?” 정상적인 말투였지만 사실은 소이현을 난처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강지유는 이런 일을 매우 즐겼다. 소이현은 그녀의 말에 맞장구치지 않고 되물었다. “하연서 씨를 많이 좋아하나 보네?” 그녀는 왜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을 하냐는 표정을 지었다. “연서 언니를 좋아하지 않으면 새언니를 좋아하겠어?” 소이현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새언니한테 내가 좋아할 만한 대단한 게 있긴 한 거야? 하나라도 있으면 당장 새언니 좋은 말만 할게.” 강지유는 상처가 되는 말들을 항상 아무렇지 않게 툭 내뱉었다. 강도훈처럼 냉랭하진 않았지만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함정이었다. 이는 또 다른 종류의 잔인함이었다.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소이현은 강지유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꾹 다물었다. 예상했던 반응이 나오지 않자 강지유는 흥미를 잃은 듯했다. “연서 언니가 왜 레이싱하는지 궁금하지?” 소이현이 궁금하지 않다고 말하려던 찰나 강지유가 먼저 답했다. “연서 언니가 썬의 경기를 보고 레이싱에 반했어. 지금은 거의 프로 선수급이야. 물론 아직 썬과는 차이가 많이 나긴 하지만. 이 세상에 우리 썬보다 잘하는 선수는 없어.” 소이현이 멈칫하더니 두 눈에 기묘한 빛이 스쳤다. “썬 때문에 레이싱을 시작했다고?” 강지유는 소이현의 표정 변화를 알아채지 못하고 추억에 잠겼다. 두 눈에 열광과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썬을 못 본 지 엄청 오래됐어. 나 썬의 열성 팬이거든. 거의 실물도 보고 사인도 받을 뻔했는데... 됐어. 새언니한테 말해봤자 뭘 알겠어.” 소이현을 쳐다보는 강지유의 얼굴에 혐오가 가득했다. “이게 바로 내가 새언니를 싫어하는 이유야. 새언니랑 내 취미에 대해 얘기해도 소 귀에 경 읽기처럼 아무것도 모르잖아.” 소이현은 어이가 없었다. ‘난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하지만 연서 언니는 달라. 연서 언니도 썬을 좋아해. 나랑 공통의 이야깃거리가 있어서 함께 어울릴 수 있거든. 연서 언니는 내가 본 사람 중에 실행력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야. 난 오래전부터 레이싱을 좋아했지만 그냥 관객으로만 만족했어. 그런데 언니는 좋아하는 레이싱을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훈련에 매진했고 프로 레이서가 되려고 노력했어. 언니처럼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강지유는 어릴 때부터 부유하게 자랐고 많은 것을 보고 경험했기에 자존감이 높았다. 하여 일반 사람들은 그녀의 눈에 들지도 않았다. 그런 그녀가 하연서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동경하고 있었다. 강지유는 두 사람을 비교할수록 소이현을 점점 더 얕잡아봤다. “새언니, 오빠가 새언니한테 마음을 주지 않는 것도 이해돼. 자신을 좀 봐봐. 얼굴이 예쁜 것 말고는 아무 매력이 없어.” 그녀는 손을 닦고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비아냥거렸다. “이따가 연서 언니 경기할 때 절대 무너지지 마.” 소이현은 말을 잇지 못했다. 강지유가 떠난 후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뒤돌아보니 박지연이었다. 박지연이 말했다. “이현아, 대체 어떻게 참았어? 나였으면 따귀 몇 대 때리고도 남았어.” 소이현이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내가 강지유를 때렸다면 더는 인천에서 발을 붙이지 못해. 나뿐만이 아니라 민찬이까지 피해를 볼 거고.’ 그녀는 웃으면서 박지연의 장난에 응했다. “때릴 용기가 없었어.” “겁쟁이.” 박지연이 혀를 차며 화제를 돌렸다. “솔직히 나도 이해는 가. 나라도 강씨 가문을 건드리지 못했을 거야.” 강씨 가문은 인천의 최고 명문가 중 하나였다. 만약 이 바닥에서 먹고 살려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박지연의 속내는 여전히 불순했다. “강지유를 상대하려면 한 대로는 부족해. 네가 썬인 걸 알면 얼마나 큰 충격을 받겠어. 그 모습을 봐야 속이 시원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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