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소이현은 강도훈과 결혼한 후 이혼에 관해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목숨까지 기꺼이 바칠 정도로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으니까.
그런데 그의 첫사랑이 돌아왔다.
...
병원.
의사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이현 씨, 이번 유산으로 몸이 많이 상했습니다. 앞으로 임신 가능성이 크지 않으니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순간 소이현은 머리가 윙 했다.
3년 동안 갖은 애를 쓴 끝에 두 달 전에 겨우 아이를 가졌었다. 그런데 오늘 오후 외출 중에 갑자기 튀어나온 차 한 대 때문에 놀라 넘어지고 말았다...
의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소이현 씨?”
“네, 알겠어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남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소이현은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고 진료실을 나섰다.
간호사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이렇게 큰일이 났는데 남편은 왜 안 보이는 거죠?”
“말도 말아요. 아까 자궁 소파술을 하기 전에 환자분이 남편한테 제발 와달라고 울면서 전화했는데도 끝내 안 왔어요.”
“세상에나. 누가 봐도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데 왜 이혼 안 하고 버티고 사는지 모르겠네요.”
소이현이 멀리 가버린 바람에 뒷말은 듣지 못했다.
사실 강도훈은 병원에 오지 않겠다고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전화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었다.
“유산됐으면 유산된 거지, 뭘 울고 그래? 나 지금 바쁘니까 방해하지 마.”
그 후에도 소이현이 몇 번이고 전화를 걸었지만 강도훈은 한 통도 받지 않았다.
지난 3년 동안 그녀를 대하는 강도훈의 태도는 늘 싸늘했다. 솔직히 말해 이젠 익숙해졌다.
3년 전에 소이현이 우연히 강도훈의 할아버지인 강민호를 살려준 덕에 강민호의 마음에 들어 강도훈과 결혼하게 되었다. 이 일이 없었더라면 소이현의 신분으로는 절대 강씨 가문의 며느리가 될 수 없었다.
강도훈은 처음부터 이 결혼을 원치 않았다.
뱃속의 아이를 봐서라도 옆에 있어 줄 거라 생각하여 오늘 끈질기게 연락했지만 아무래도 괜한 기대를 한 것 같았다.
소이현은 생각을 접고 택시를 잡아 집으로 돌아가 쉬려 했다. 휴대폰을 꺼낸 그때 메시지 하나가 떴다. 강도훈의 절친인 고태훈에게서 온 영상이었다.
영상의 시작은 장미꽃다발이었다. 적어도 999송이는 돼 보였는데 너무 많아 화면에 다 담기 힘들 정도였다.
카메라를 왼쪽으로 옮기자 강도훈이 나타났고 그의 옆에 어떤 여자가 있었다. 다름 아닌 하연서였다.
소이현의 눈빛이 급격하게 흔들렸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영상 속에서 누군가가 분위기를 띄웠다.
“연서 누나, 도훈 형이 오늘 누나가 귀국하는 거 알고 오래전부터 환영 파티를 준비했어. 진짜 엄청 신경 썼어.”
“이 정도면 안아줘야 하는 거 아니야? 빨리 도훈이 형한테 고맙다고 해.”
“그걸로 되겠어? 키스해야지. 전에 키스한 적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때 3분 동안 키스하던 영상 나 아직도 가지고 있어.”
하연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은 상황이 좀 그래서...”
그녀의 말이 끝나기 전에 강도훈이 먼저 하연서를 끌어안았다.
“연서야, 돌아온 걸 환영해.”
말투와 행동 모두 몹시 다정하고 자연스러웠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봐. 도훈이는 전혀 신경 안 쓴다니까.”
“키스해. 키스해.”
영상이 여기서 뚝 끊겼다. 고태훈이 메시지를 철회했기 때문이었다.
[미안해요. 잘못 보냈어요.]
영상을 아주 빨리 철회했기에 고태훈은 소이현이 아직 확인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여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소이현은 채팅창을 오랫동안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러다가 입꼬리를 씩 올리며 웃었다.
‘강도훈이 말했던 중요한 일이 바로 이거였구나.’
그녀는 강도훈의 마음을 얻으려 꼬박 3년을 헌신했지만 결국 마음은 얻지 못하고 그사이 그의 첫사랑만 귀국하고 말았다.
강도훈의 마음이 그녀에게 돌아올 가능성이 더욱 희박해졌다. 이젠 이 욕심을 접어야 할 때가 왔다.
소이현은 집으로 돌아가 짐을 정리했다.
지난 몇 년간 삶이 단순했던 터라 별로 산 것도 없어 필요한 옷가지와 증명서 말고는 챙길 게 없었다. 26인치 캐리어 하나면 충분했다.
그렇게 30분도 채 되지 않아 짐 정리를 마친 후 강도훈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새벽 두 시가 되어서야 현관문이 열렸다.
거실을 지나가던 강도훈이 소이현을 발견했다. 술자리 때문에 늦게 들어올 때마다 소이현이 항상 이렇게 기다렸기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몸이 안 좋으면 일찍 쉴 거지.”
걱정이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목소리였다.
“기다리고 있었어.”
강도훈이 들어온 순간부터 소이현의 시선은 그의 입술에만 머물러 있었다. 입술이 참 예쁘긴 했지만 심하게 찢어져 있었다.
흰 셔츠 깃과 목에도 립스틱 자국이 묻었다.
‘정말 키스했구나. 다른 것도 했겠네, 그럼.’
소이현은 갑자기 가슴을 칼로 도려낸 것처럼 아팠다.
3년 동안 강도훈이 그녀의 몸을 원했던 횟수가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시댁 식구들이 아이를 낳으라고 재촉하여 어쩔 수 없이 관계를 가지곤 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먼저 키스한 적도 없었다. 매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고 그녀를 아껴주려는 마음도 없었다. 하여 그 과정이 소이현에게는 그야말로 고통이었다. 끝난 후에 안아달라고 하면 거들떠보지도 않고 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그녀에게 남은 건 언제나 차가운 뒷모습뿐이었다.
강도훈은 소이현의 옆에 있는 캐리어를 발견하자마자 바로 눈치챘다.
“태훈이가 보낸 영상 봤어?”
“응. 봤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니 술 냄새와 함께 역겨운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우리 이혼...”
그런데 소이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도훈이 무심하게 말했다.
“다 알았다면 얘기할 필요도 없겠네. 그냥 이혼하자. 연서가 유학 가지 않았더라면 너랑 결혼했을 리가 없다는 걸 너도 알 거야.”
이렇게까지 얘기한 이상 소이현도 동의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
“오늘은 늦었으니까 일단 쉬고 내일 나가.”
“괜찮아. 이혼 합의서에도 이미 사인했어.”
소이현이 티테이블을 가리켰다.
사실 신혼 첫날밤에 강도훈은 이혼 합의서를 그녀에게 건넸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비로소 결심하고 사인했다.
이번에는 강도훈이 의외라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진심인지 아닌지 의심했다.
“술 마실 줄 알고 해장국 끓어놨어. 주방에 있어.”
소이현은 망설이다가 결국 알려줬다.
아무래도 습관이 됐나 보다. 강도훈의 마음을 얻으려고 그의 식생활과 일상생활을 모두 직접 챙겼었다.
요리에 서툴렀던 그녀가 못하는 요리가 없을 정도로 만렙이 될 때까지 정말 숱한 고생을 했다.
매번 강도훈에게 밥 한 끼를 차려주려면 장을 보는 것부터 완성까지 몇 시간이 걸렸고 손을 베거나 데는 건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강도훈의 입맛이 까다로워서 아무리 맛있어도 한 번도 맛있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분명 표정은 맛있다고 말해주고 있는데.
그의 칭찬 한마디에 소이현이 얼마나 오랫동안 좋아할지 강도훈은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 기쁨을 주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갈게.”
3년이나 부부로 살았지만 헤어지는 순간에는 할 말이 없었다.
강도훈이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 밤은 그냥 여기서 자.”
“아니야.”
소이현이 캐리어를 끌고 나갔다.
강도훈은 그의 뜻을 거스르는 소이현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현관문이 닫힌 그때 고태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집에 도착했지? 이현 씨한테 물어봤어? 영상 봤대? 미안해. 정말 일부러 보낸 거 아니야. 그런데 봐도 괜찮지 않아? 어차피 두 사람 맨날 싸워서...”
강도훈이 말을 가로챘다.
“나랑 이혼하겠대.”
“뭐? 이혼?”
고태훈이 크게 놀란 듯했다.
“고작 그 영상 때문에?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 이현 씨가 너랑 이혼하면 손에 장을 지진다, 내가.”
“내가 먼저 꺼냈어.”
고태훈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 강도훈이 먼저 이혼 얘기를 꺼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소이현이 절대 떨어지려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혼 얘기 지난번에도 금방 하지 않았어? 한 달이나 됐나?”
고태훈이 비아냥거렸다.
“그때 이현 씨가 반나절이면 돌아온다고 내기했다가 내가 이겼었지? 이번에는 하루 걸게. 내가 이기면 또 밥 사.”
강도훈이 굳게 닫힌 현관문을 곁눈질했다. 밖에서 차에 시동 거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의 소이현은 평소와 다르게 아주 단호했다.
하지만 강도훈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내일 저녁까지 기다릴 필요 없어. 내일 아침이면 돌아올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