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 발표 당일 서현석의 이름은 온 인터넷을 휩쓸었다.
만점 500점에서 그가 500점을 받은 것이다. 각 언론사는 앞다투어 그를 수능 만점자로 보도했고 SNS 실시간 검색어는 순식간에 폭발했다.
본인은 자신의 SNS에 성적표를 올리며 조유나와의 키스 사진을 함께 게시했다.
[내 여자에게는 제일 좋은 것만 줄 거야. @조유나]
반급 단톡방은 뜨겁게 달구어졌다.
[헐, 남신이 만점이라니! 이게 사람 인간이야?]
[어휴, 공부 잘하는 남신에 얼굴까지 반반한 사랑꾼이라니. 대박, 너무 완벽한 거 아니야?]
[조유나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 남친 개 쩐다. 진짜 잘생김!]
[하나님, 훈남 훈녀에게 사랑의 자물쇠를 걸어주세요. 키는 제가 삼키겠습니다.]
축복이 쏟아지는 가운데 어울리지 않는 문자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조유나 진짜 부럽다. 난 평생 이런 좋은 남자친구는 못 가질 거야.]
전소연이었다.
이 가난한 전학생의 발언에 채팅방은 몇 초간 조용해졌다.
조유나가 답글을 달려는 찰나 서현석이 전소연에게 2억 원의 특별 송금을 보내며 문자를 덧붙였다.
[너도 가질 수 있어.]
조유나는 서현석이 그저 너무 착해서 그런 줄만 알았다.
비 오는 날 우산을 씌워주던 서현석, 그녀의 책상 속에 몰래 아침을 넣어주던 서현석, 조유나의 ‘부럽다’라는 말 한마디에 2억 원을 송금해주던 서현석.
그러던 중 우주 대학교 입학처에서 전화가 왔다. 서현석이 입학하면 ‘커플 동시 입학’ 명의로 한 명을 더 추가 모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 자리에 전소연의 이름을 적어넣었다.
나중에 조유나를 달래며 설명했다.
“유나야, 소연은 집이 가난해서 명문대에 못 가면 고향으로 내려가서 억지로 결혼해야 해. 걔가 너보다 이 기회가 더 필요해. 너는 성적이 괜찮으니까 우주 대학교 근처의 다른 대학교를 지원하면 되잖아. 그럼 우리 계속 같이 있을 수 있어.”
그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계획했지만 막상 지원 마감 직전 전소연이 조유나의 계정으로 몰래 들어가 그녀의 지원서를 몇백 킬로미터 떨어진 전문대학으로 바꿔치기 한 건 몰랐다.
우주 대학교의 꿈은 산산이 조각났고 전문대학은 그녀의 바람이 아니었다.
이제 그의 사랑이 더는 순수하지 않다면 그녀는 차라리 놓아주기로 했다.
...
“유나야, 외국 학교는 이미 신청 다 해놨어. 개학하면 바로 갈 수 있어.”
김혜진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그런데 정말로 유학 갈 생각이야? 현석은 어릴 때부터 너랑 꼭 붙어 다녔잖아. 이제 현석은 우주 대학교, 너는 외국으로 갈 건데 장거리 연애 쉽지 않을 거야.”
조유나는 휴대폰을 쥔 채 눈앞에 서현석의 돌잡이 때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그해 그는 겨우 한 살이었다. 가지런히 놓인 돌잡이 물건들 사이를 비틀거리며 조유나를 향해 기어가더니 그녀의 다리를 꼭 껴안고 놓지 않았다.
양가 어른들은 배꼽이 빠지게 웃으며 서현석은 어릴 때부터 자기 신붓감을 점찍어놨다고 말했다.
그 후로도 그는 정말 늘 그녀 주위를 맴돌았다.
유치원 때는 꼭 그녀 옆자리에 앉아야 했고 초등학교 때는 매일 하교를 기다렸다. 중학교에서는 그녀와 같은 반이 되려고 전교 1등을 했고 고등학교에선 아예 노골적으로 자신의 소유권을 선언했다.
양가 부모는 둘 사이가 좋은 걸 보고 그냥 약혼까지 시켜버렸다.
모두가 그들은 한 쌍이라고 알고 있었다. 전소연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가난한 전학생인 그녀는 매일 말라빠진 빵만 챙겨 먹고 빛이 바랜 교복을 입고 다녔다.
어떤 친구들은 그녀를 비웃었지만 서현석은 늘 가장 먼저 나서서 그녀를 도왔다. 조유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심지어 그녀를 위해 변호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점차 전소연은 서현석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하교할 때 서현석의 뒤를 따르고 그에게 아침을 챙겨주며 운동장에서 뛰는 그에게 물을 갖다 주곤 했다.
그러다 그 사고가 났다. 교실 천장에서 떨어지는 선풍기를 서현석 대신 막아섰다가 갈비뼈 두 개가 부러져 한 달 동안이나 입원해야 했다.
그때부터 서현석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전소연에게 쏟는 관심은 점점 많아졌고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은 또한 부드러워졌으며 이제는 우주 대학교 커플 동시 입학 기회도 전소연에게 주었다.
조유나는 그것이 고마움 때문인지 아니면 진짜 마음이 움직인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100% 사랑을 경험해본 그녀는 이제 변해버린 사랑을 원하지 않았다.
“장거리 연애 아니에요.”
그녀는 휴대폰 너머로 조용히 말했다.
“엄마, 이제 우리 길이 다른 것 같아요. 그 약혼은 취소하는 게 좋겠어요.”
“진심이야?”
김혜진이 놀라 물었다.
“네. 저는 마음을 굳혔어요.”
휴대폰 너머에서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이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네가 아직 어리니 앞으로 많은 사람을 만날 거야. 그럼 네가 유학 갈 때 우리가 서씨 집안에 가서 파혼하자.”
“파혼이라고?”
맑고 깨끗한 남자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갑자기 들려왔다.
조유나가 돌아보자 서현석이 언제 왔는지 현관문을 열고 서 있었다.
그는 검은색 야상 점퍼를 입었다. 키가 크고 다리가 길어 그는 타고난 옷걸이처럼 무엇을 입어도 멋있었다.
등 뒤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그의 잘생긴 윤곽을 그려내며 소년다운 패기를 드러냈다. 한때 조유나를 심쿵하게 만들었던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얼굴을 보아도 그녀의 마음은 오히려 평온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조유나는 전화를 끊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서현석은 더는 묻지 않고 웃으며 다가와 고급스러운 드레스 가방을 건넸다.
“유나야, 빨리 옷 갈아입고 같이 사은회 가자.”
그는 몸을 숙여 가까이 다가와 목소리를 낮췄다.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거 고른 거야.”
조유나는 가방을 건네받았다.
사은회는 미리 약속되어 있었고 게다가 유학을 하러 가면 선생님이나 친구들을 만날 기회도 줄어들 것이다.
‘마지막 작별 인사라고 생각하자.’
조유나가 위층으로 올라가 드레스를 갈아입고 내려오니 전소연이 이미 서현석의 차에 앉아 있었다.
“조, 조유나...”
전소연이 겁먹은 듯 인사를 건네며 불안하게 드레스를 만지작거렸다.
가장 거슬리는 건 그녀가 입은 드레스가 조유나와 같은 시리즈의 다른 색상이었다는 점이었다.
서현석이 다가와 설명했다.
“네 드레스 사면서 소연도 드레스가 없을 것 같아서 같이 사줬어.”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조유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손을 뻗으며 비위를 맞추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유나야, 괜히 신경 쓰지 마.”
조유나는 고개를 돌려 그의 손길을 피하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한때는 서현석이 너무 잘생긴 나머지 항상 여자들이 달라붙었지만 그의 마음엔 그녀만 있었고 다른 여자들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다른 여자에게 옷이 없을까 신경 쓰는 그런 세심함은 더더욱 없었다.
호텔에 도착하자 전소연은 여느 때처럼 자신감 없고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
서현석은 그녀 주위를 맴돌며 음식을 덜어주고 음료수를 따라주었다. 심지어 그녀가 맛있는 것을 먹으며 눈을 반짝일 때면 그 역시 다정하게 웃었다.
그 미소가 조유나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조유나. 우리도 한잔하자.”
몇몇 친구들이 다가와 건배를 제의했다.
조유나는 술을 잘 못 마셨지만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술잔을 들었다. 이때 뼈마디가 굵은 손이 그녀의 손에서 잔을 낚아챘다.
“유나는 술을 못 마시니까 내가 대신 마실게.”
서현석이 단숨에 술을 들이켰고 그의 목젖이 넘어가는 모습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현석아, 오늘 이렇게 많은 사람이 우리 여신에게 술 한 잔 권하려고 해도 네가 대산 마셔줄 거야?”
반장이 농담을 던졌다.
“그럼 술에 취해 쓰러지겠는데?”
서현석은 눈웃음을 지으며 조유나를 등 뒤로 보호했다.
“쓰러지면 어때? 내 와이프가 술을 안 마시면 그만이지.”
모두가 다시 야유와 함성을 질렀고 장내는 젊은이들의 특유한 뜨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선생님이 자리를 떠난 후 학생들은 더욱 신나게 놀기 시작했고 누군가 진실 게임을 하자고 제안했다.
앞선 몇 번의 게임은 모두 서현석이 졌다.
첫 번째 벌칙은 그의 휴대폰 최상단 대화상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유나’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보였고 뒤에는 하트 이모티콘까지 붙어 있었다.
두 번째 벌칙은 그의 앨범을 보는 것이었다.
화면에는 조유나의 사진이 가득했다.
책상에 엎드려 자는 그녀의 옆모습, 운동장에서 달릴 때 흩날리는 머리카락, 우유를 마시며 만족스럽게 웃는 그녀의 모습...
세 번째 벌칙은 메모를 보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조유나의 취향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고수를 싫어하고 딸기 맛을 좋아하며 생리 기간에 배가 아프고 망고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 심지어 ‘유나가 화났을 때는 먼저 안아주고 나서 설명하라’라는 연애 아이템까지 있었다.
“너무 달콤하잖아!”
여자아이들은 질투에 발을 구르며 말했다.
“그런데 너희 다른 대학교에 다니잖아. 조유나가 이렇게 예쁜데 혹시 누가 뺏어가면 어쩌려고?”
서현석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누가 감히 내 사람을 넘본단 말이야? 그리고 내가 이미 유나한테 우주 대학교 근처 대학교으로 지원하라고 했어. 내 눈앞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말이야. 그렇지? 여보?”
조유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원래는 그랬지만 지금은 그녀의 지원이 이미 전소연에 의해 천 리 밖 전문대학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구석에 앉아 있는 전소연을 쳐다보았다. 전소연의 얼굴은 순간적으로 창백해졌으며 긴장해서 손가락을 꼬고 있었다.
조유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들킬까 봐 두려웠다면 처음부터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그녀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다음 라운드에서 멍하니 있던 전소연이 졌고 벌칙은 왼쪽에 있는 남학생과 키스하는 것이었다.
불행히도 왼쪽에는 반에서 못생기기로 유명한 남학생이 앉아 있었다.
전소연의 눈가에 순식간에 눈물이 그렁했다. 그녀는 다른 벌칙으로 바꿔도 되냐고 낮은 소리로 물었지만 모두에게 거절당했다.
“안 돼. 반드시 키스해야 해!”
전소연은 눈을 감고 떨리는 몸을 이끌고 다가갔다.
거의 닿을 뻔했을 때 서현석이 갑자기 일어나 그 남학생을 밀쳐내고는 자신이 전소연에게 키스했다.
“숨 쉬어.”
그가 나지막이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