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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온채하가 자리에서 일어나 신 대표의 옆으로 가더니 허리를 살짝 굽혀 술 한 잔을 따라 주었다. 신 대표는 그녀의 얼굴을 훑어보며 손을 허리에 올리려고 했지만, 온채하는 잔을 살짝 들어 피했다. “신 대표님, 한 잔 드시죠.” 신 대표는 머쓱해졌고 더 이상 손을 뻗지 못한 채 잔을 비워 버렸다. 온채하는 곧 조재우의 곁으로 물러나 다시 얌전한 자세로 서 있었다. 중년 남자들은 비로소 본론에 들어가 오늘 밤의 거래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누군가 말했다. “방금 1층 로비에서 배승호를 봤는데, 기세가 장난 아니더라고요. 배씨 가문이 둘째를 후계자로 세우려는 건가요? 첫째가 과연 가만히 있을까요?” 다른 사람이 받았다. “첫째는 온화하고 우아해서, 밑바닥에서 올라온 배승호랑은 기질이 완전 다르죠. 배승호는 수단도 세고, 가족들도 좀 무서워한다던데. 들으니 또 첫째가 자기 동생을 꽤 감싸 준다던데 진심인지는 모르겠네요.” “하하, 재벌가 속사정이야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요. 저도 배승호한테 명함 줬는데, 눈길 한번 안 주더라니까요.” “명함 줄 사람을 잘못 골랐네요. 예전에 연회에서 배승호가 데리고 다니던 진여울이라는 여자 칭찬 두 마디 해 줬더니 바로 명함 받던데요.” 올해 39살인 조재우가 그 말을 듣고 온채하를 바라보았다. 눈가에는 묘한 동정이 스쳤다. 온채하는 이미 익숙해진 듯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다른 남자가 말을 이었다. “배승호가 진여울한테는 진짜 잘하더라고요. 몇 년간 연회 다닐 때마다 꼭 데리고 다녔대요. 원래 결혼 직전까지 갔다가 듣보잡 여자가 약 먹이고 훼방 놓았다던데.” “그 얘기 말인데, 그 집안 여자 얼굴 본 사람 있어요? 아무도 못 봤을걸요?” 사람들은 배승호와 서류상 아내의 관계를 마음껏 추측하며, 혹시 너무 미워해서 숨겨 버린 건 아닌지, 심지어 이미 뼈도 못 추리게 만들었을지 상상의 나래를 폈다. 그때 조재우가 낮게 웃었다. “그 얘기는 온 비서가 제일 잘 알죠. 배승호가 그 여자를 정말 뼈도 못 추리게 했는지 온 비서가 말해 보지 그래요?” 온채하의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 그녀는 현장에 모인 호기심 어린 얼굴들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설마요. 여기는 법치 국가인데요.” 순간 모두 폭소를 터뜨리며 그녀를 재치 있다고 했다. 조재우도 웃었지만, 눈가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그는 배성 그룹 관리직까지 해 본 사람이라 방 안의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온채하도 따라 웃다가 핑계를 대고 화장실로 향했다. 여자 화장실 거울 앞에 서자 창백한 얼굴이 비쳤다. 이마 쪽에는 어지럼증이 계속 올라와 구역질이 치밀었다. 얼굴에 찬물을 끼얹어 정신을 가다듬고 나오는데, 옆 벽에 기대선 배승호가 보였다. 5층은 보통 객실뿐이라 그가 내려온 건 의외였다. 그러나 온채하에게는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배승호.” 그녀가 그를 불러 세웠다. “출장 중이라더니 여기에 있었네? 내일은 시간 돼?” 그의 시선이 그녀의 뺨을 스쳤다. “내일은 주말이야. 가정법원 쉬거든? 네 머리로는 전업주부가 딱이겠네.” 온채하는 그의 비아냥에 익숙했다. 그래서 별다른 표정 없이 조재우의 방으로 몸을 돌렸다. “그럼 월요일에 성 비서님한테 연락할게.” 예전에는 그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늘 받지 않았다. 그래서 성시현에게 연락하는 게 버릇이 됐다. 배승호는 낮게 비웃었다. “네 마음대로.” 온채하는 더 말하지 않고 방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그의 목소리가 등을 때렸다. “집에서 전업주부로 사는 게 여기서 기름기 낀 아저씨들한테 험한 소리 듣는 것보다 낫지 않아? 온채하, 너 예전에는 자존심 꽤 있지 않았어?” 결혼 3년 동안 그가 집에 온 횟수는 손가락으로 셀 만했다. 그녀의 자존심은 우울증 속에서 이미 다 닳아 버렸다. 지금도 여러 방법으로 겨우 회복 중일 뿐이다. “나는 여기 있는 게 네 옆에 있을 때보다 더 편해.” 순간 배승호의 분위기가 싸늘해지며 눈빛이 섬뜩했다. 그는 성큼 다가와 그녀 손목을 움켜잡더니 턱을 거칠게 쥐었다. “뭐라고? 다시 말해 봐!” 턱이 너무 아파서 입술이 떨렸지만 온채하는 담담히 그를 바라봤다. 몇 초 후, 그는 손을 툭 놓고 바지 주머니에 넣으며 말을 내뱉었다. “좋아. 그럼 그 사람들하고 계속 놀아. 그리고 다시는 나를 찾지 마. 우리는 진작 끝났어야 하니까.” “알아.” 온채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옅게 웃었다. “다시는 안 찾아.” 하지만 예전에는 어디에 있든 꼭 찾아내겠다고 그의 손을 잡았던 게 그녀였다. 배승호는 온채하를 더 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떠났다. 온채하는 그가 자신을 보러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녀는 이만 방으로 돌아갔다. 조재우는 이미 협상 마무리 단계였다. 일어설 준비를 하면서는 신 대표와 눈짓을 주고받았다. 아까 온채하가 자리를 비웠을 때 신 대표는 그녀가 자신을 집까지 데려다줬으면 좋겠다고 했고, 방 안 사람들은 모두 의도를 눈치챘다. 집안 단속이 심한 이들이라 겉으로는 여직원을 못 두지만 바깥에 여자를 숨겨 두고는 했으니까. 그런데 온채하만큼 예쁜 여자는 없었다. 하룻밤이라도 같이하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을 터였다. 조재우가 온채하를 살짝 밀었지만 정말로 신 대표의 곁으로 보낼 정도의 힘은 아니었다. “이게 다 온 비서가 신 대표 마음을 홀린 탓이야.” 온채하는 자연스럽게 받았다. “제 불찰입니다. 다음에 제가 신 대표님께 술 한잔 대접할게요. 명함 주시겠어요?” 신 대표는 흡족해하며 명함을 건넸다. 온채하가 두 손으로 조심스레 받자 신 대표는 기분이 더 좋아져서 바로 계약을 수락했다. 조재우가 준비해 둔 계약서를 꺼내 온채하에게 넘겼다. 그녀가 어쩔 줄 몰라 하자 신 대표는 미인이 곤란해하는 모습이 보기 싫다며 곧바로 서명했고,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온 비서, 연락해. 배울 게 많을 거야.” “꼭 연락드릴게요.” 온채하는 웃으며 대답했다. 일행이 호텔 로비에 내려오자 맞은편 엘리베이터에서 배승호 일행이 나오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의사 임재준과 소지현이 함께였다. 세 사람 모두 온채하를 달가워하지 않는 이들이다. 온채하는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그러나 임재준이 그녀를 발견하고 미소 섞인 눈빛으로 말했다. “이게 누구야, 온채하 아니야?” 순식간에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마침 신 대표의 손이 그녀의 어깨에 얹혀 있었고, 누가 봐도 추근거리는 모양새였다. 신 대표도 배승호 일행을 알아보고는 태도를 바꿔 소리치듯 다가갔다. “배 대표님! 소 대표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예전에 명함 드렸는데 기억하실지...” 그는 허리를 깊이 숙이며 두 사람의 구두라도 핥을 듯 비위를 맞췄다. 배승호의 시선이 멀리 온채하에게 닿았다. 그녀는 그를 보지 않고 조재우와 무엇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조재우는 곧 40살이 되는 나이지만 관리를 잘해서 활기찬 표정으로 배승호의 시선을 받아냈다. 온채하의 얼굴에는 무표정이 흐르고 있었다. 배승호는 문득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언제부터 이토록 무표정한 얼굴이 되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영롱하게 웃던 건 아주 오래전이었다. 그의 목울대가 잠시 움직였고, 곧 시선이 신 대표에게 고정됐다. “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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