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심연우는 담담하게 하경찬을 한번 훑어본 뒤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하경찬, 하씨 가문이 날 죽이지 않을까 봐 겁나 죽겠지?”
남자는 살짝 기침을 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
심연우가 바람둥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는 바로 집안 잔치에 데려가 자신의 위세를 떨치려 하다니... 하씨 가문도 더는 참지 못할 것이다.
“심계명과 짜고 엄마를 들먹이며 날 협박하다니! 정말 비열하기 짝이 없구나!”
심연우는 빨간 드레스를 집어 하경찬의 머리 위로 던졌다.
“그래, 그렇게까지 허나정 같은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애쓰니 네 소원대로 해주지!”
심연우는 몸에 감긴 붕대 따위 신경 쓰지 않은 채 섹시한 스트랩 원피스를 입고 하경찬을 따라 본가로 돌아왔다.
또각또각 10cm 하이힐에 엉덩이를 흔드는 유혹적인 자태는 저도 모르게 모든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하씨 가문 도련님이 미친 거 아니야? 어떻게 사모님 생일 잔치에 저 여자를 데려올 수 있어? 하씨 가문 체면 따위 안중에도 없는 거야?”
“나도 놀랐어, 여자가 바람까지 피웠는데도 헤어지지 않아? 데리고 와서 결혼까지 하겠다니?”
“내가 사모님이었으면 체면 다 내팽개쳐도 절대 집안에 들이지 않았을 거야!”
하경찬은 이미 뒷마당으로 불려 갔지만 심연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입꼬리를 올리며 보드카 한 모금을 쭉 들이켰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하씨 가문 경호원들이 서둘러 달려오더니 빠른 속도로 심연우 주위를 에워쌌다.
“심연우 씨, 사모님께서 이곳은 심연우 씨를 환영하지 않으니 당장 나가달라고 합니다.”
“푸흡!”
이 말에 심연우는 웃음을 터뜨렸다.
“왜? 술 한 잔도 마시면 안 되는 거야? 난 하경찬 따라 ‘미래 시어머니’께 생신 축하드리러 온 건데 사람 쫓아내려고 하는 거야?”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한복을 입은 박화진이 분노를 억누르며 심연우 앞에 나타났다.
“누가 네 시어머니냐? 심연우, 하씨 가문에 와서 함부로 날뛸 생각 마! 당장 무릎 꿇어! 감히 하씨 가문에 제 발로 찾아오다니! 우리 하씨 가문 평판을 망치면 어떻게 되는지 내가 똑똑히 가르쳐주마!”
안 그래도 화풀이할 곳이 없었던 심연우는 마침 기회를 잡은 듯 냉랭한 얼굴로 입꼬리를 올렸다.
“하씨 가문 평판이 나와 무슨 상관인데요? 본인 아들 관리 못 한 걸 왜 내 탓으로 돌리는데요? 왜 날 가르치려 드는 건데요!”
말하며 손을 들어 술잔을 내던졌다. 경호원들이 달려드는 것을 보자 옆의 탁자와 의자를 번쩍 들어 엎어버린 뒤 생신 축하 화환이 온 쪽으로 달려가 마구 쓰러뜨리며 마지막에는 축하 꽃다발과 현수막을 모조리 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렸다.
와르르하는 술잔 깨지는 소리와 함께 주위에는 술렁이는 소리와 비명이 가득했다.
화가 난 박화진은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저 못된 여자 좀 잡아라!”
연회장이 아수라장이 된 후에야 경호원들이 드디어 심연우를 붙잡았다.
박화진은 심하게 요동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겨우 체면과 우아함을 유지했다.
“여러분께 안 좋은 꼴을 보였네요. 우리 하씨 가문에서는 며느리를 고를 땐 반드시 집안 심사를 거칩니다. 하지만 심연우 씨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네요. 오늘 내가 경찬이 대신 중대한 결정을 하나 할 예정입니다. 인천의 허나정 씨는 품행이 착하고 말투가 우아하며 경찬이와 스위스 유학 시절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비록 심연우의 의붓동생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어느 부분에서나 모두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우리 하씨 가문에서는 직접 허나정 씨에게 찾아가 청혼을 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경찬이와 허나정 씨의 혼사를 최대한 빨리 준비할 것입니다.”
이 말이 떨어지자 주변에서 찬사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역시 사모님이 사람 볼 줄 아시네요. 진작 이렇게 해야 했어요!”
뒷마당에 갔던 하경찬도 서둘러 뛰쳐나왔다.
목젖을 살짝 움직였지만 여전히 단정하고 청렴한 모습을 유지했다.
“어머니, 저... 저도 하씨 가문 체면을 구겼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만... 어머니 결정을 따르겠습니다...”
눈앞의 모든 장면들이 심연우는 그저 역겹기만 했다.
경호원에게 양손이 붙잡혀 있다가 갑자기 힘이 빠져 몸을 숙여 마구 토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저 여자, 혹시 임신한 건 아니야...”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 한마디 하자 하경찬의 안색이 확 변하더니 달려와 심연우를 번쩍 들어 안고는 재빨리 하씨 가문 본가를 뛰쳐나갔다.
심연우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늘도 무심하지! 어떻게 이런 장난을 치다니...’
떠나기 직전 하경찬의 아이를 갖게 되었다.
병실에 누운 심연우는 뺨이 부은 채 멍한 얼굴로 천장만 응시했다.
옆에 있는 하경찬은 검사 결과지를 받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누가 일부러 그랬는지 아니면 소문이 새어나갔는지 병원 산부인과에서 심연우를 봤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하경찬이 허나정과 결혼은 하지만 심연우가 임신했다는 소식이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연우야, 이 아이는 정말 안 좋은 타이밍에 찾아왔어. 어머니가 겨우 나정이를 집에 들이는 걸 허락했는데... 이렇게 중요한 상황에 어떻게... 이 아이 인정할 수 없어!”
평생 처음으로 무기력함이 무엇인지 깨달은 심연우는 손에 닿는 모든 물건을 집어 던졌다.
“꺼져!”
물컵에 맞아 이마가 찢어진 하경찬을 본 심연우는 입꼬리를 올렸다. 분명히 지칠 대로 지쳤지만 표정은 여전히 당당했다.
“설마 내가 네 애를 낳길 원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이 순간 심연우의 그 미소 때문에 하경찬은 목구멍이 콱 막히는 듯했다. 이내 말로 할 수 없는 감정이 용솟음쳤다.
하경찬은 더 이상 참지 못한 듯 심연우를 품에 꽉 안았다.
가슴은 저도 모르게 오르락내리락했다.
“감정적인 말 그만하면 안 돼? 연우야, 네가 아이를 가장 좋아하는 거 알아. 약속할게, 아이 낳자. 낳고 나면 너희 둘 내가 스위스에 있는 별장으로 모내 줄게. 비록 밖에서 키우는 거지만 너희 모자에게 줘야 할 재산 반드시 다 챙겨줄게. 하지만 지금은 네가 한 번만 더 참아줘.”
당일 오후 위조된 ‘유전자 검사 결과’가 인터넷에 퍼져 나갔다.
폭로자는 내부 자료를 입수했다고 주장했다. 심연우의 배 속 아이가 하경찬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쓰인 검사 결과에 사람들은 또다시 수군거렸다.
“세상에! 사모님 덕분에 손해를 안 볼 수 있었어. 검사 결과가 나오자마자 하씨 가문 사람들은 하경찬이 또 귀신에게 홀려 대리 아빠가 될까 봐 두려워 급히 허나정 씨와의 혼사를 정했대. 다음 주에 결혼식을 올릴 거래!”
주위에서 들리는 말들에 심연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의사를 찾아 낙태 수술을 예약했다.
긴 잠을 잔 후 깨어났을 때 몸 안이 공허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오랫동안 꿈을 꾸다가 깬 것 같았다.
퇴원하는 날은 마침 하경찬과 허나정의 결혼식 날이었다. 심연우는 가방 하나를 들고 심씨 가문 본가로 돌아갔다.
익숙한 저택, 곳곳에 등불이 걸려 결혼식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이미 웨딩드레스로 갈아입은 허나정은 기쁨에 겨워 가족들과 함께 결혼식 차에 올랐다.
심연우는 혼자 텅 빈 별장에 발을 들였다.
이틀 전, 심계명이 심연우에게 한 가지를 약속했었다. 허나정이 하씨 가문에 시집가는 날 엄마의 유골과 유품을 돌려주겠다고...
그걸 받은 후 심연우는 영원히 부산을 떠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거실 탁자에는 그녀가 원하는 것들이 놓여 있었다.
하나씩 가방에 넣은 뒤 마지막으로 익숙한 저택을 한번 돌아보고는 탁하고 손의 라이터를 켠 뒤 소파에 던졌다.
재빨리 집을 나온 후 대문을 나서자 누군가 이리저리 살피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가씨, 택배입니다. 혹시 보내실 물건이 있다고 예약한 거 맞나요?”
심연우는 준비해 둔 선물 상자를 건넸다.
“맞아요. 크리스털 호텔로 보내 주세요. 신랑이 직접 받아야 해요.”
선물 상자 안에는 심연우가 직접 포장한, 그 형체를 갖추지 못한 아이가 들어 있었다...
하경찬이 오늘을 위해 여러 해 동안 준비한 일, 모두가 축제의 분위기에 잠겨 있을 때 축하 선물을 보내 평생 잊지 못하게 할 것이다.
모든 정리를 마친 뒤 재빨리 차에 올라 공항으로 직행했다.
뒤에서 미약한 불꽃이 점점 번져 점점 하늘 높이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