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가윤은 더 이상 가면을 쓰고 있을 수 없었다. 나영재와의 결혼도 이젠 불가능했다.
지금 허가윤이 할 수 있는 일은 나영재가 완전히 진실을 파악하기 전에 떠나는 것뿐이다. 그래야만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 일말의 희망이 있다.
"나 갈게." 짐 정리를 끝낸 허가윤은 나영재의 곁을 지나치며 한 마디를 남겼다. "네가 믿든 말든 난 너를 속인 적 없어."
말을 마친 허가윤은 자리를 떠났다.
허가윤이 멀어지는 것을 본 나영재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기다려."
"또 볼일 남았어?"
"입원 기록은 누가 만들어줬어?"
"우리 사촌 오빠." 허가윤은 준비해뒀던 변명을 입에 올렸다. "사촌 오빠가 그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어. 친구가 내 건강을 걱정하는게 싫어서 가짜로 하나 만들어달라고 했어."
나영재는 뚫어져라 허가윤을 바라보았다.
허가윤이 하는 말은 한 글자도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방금 전 허가윤이 했던 말이 떠오르며 머릿속에 자동으로 안소희의 얼굴이 그려졌다.
"3개월 전에 다른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는데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 내 입원 기록이 없어." 허가윤은 가녀린척하는 연기보다 이런 연기가 더 제격이었다. "센트럴병원 5월 3일부터 6월 7일 사이의 기록을 조사해 봐."
"너를 다시 찾아온 이유는 지난번에 이야기했던 그대로야."
허가윤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손을 들어 눈물을 훔쳤다.
나영재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화가 난 것도 아니고
실망한 것도 아니다.
감정의 동요조차 생기지 않았다. 단지 허가윤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가." 나영재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냉담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우리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야."
허가윤은 보는 사람이 마음 아플 정도로 힘겹게 미소 지었다. "그래."
허가윤은 캐리어를 끌고 나갔다.
이전에 나영재가 자신의 거짓말을 알아차리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영재에게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이야기하면 나영재가 자신에 대한 보호와 관심으로 지켜줄 것이라 여겼다. 자신을 위해 그 사람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