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아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채 여진한으로 변장하고 기한수의 집을 찾았다. 기한수는 처음엔 큰아들인 줄 알았으나 키를 보고는 아닌 듯하다고 여겼다.
기한수는 침대에 기대 있었고 얼굴빛은 창백했다. 잠깐 힘이 솟는 듯했지만 이내 기력이 빠져나가 다시 수척한 모습을 보였다.
기한수는 이재희의 손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너무 감격스러워 목이 메어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재희는 세상 물정을 잘 몰라 기한수의 감정에 휩쓸려 옆에서 함께 눈물을 흘렸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손자와 할아버지처럼 친밀해 보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이진아는 기씨 가문에 남은 이들이 모두 노장뿐이고 젊은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어르신, 댁의 아들과 손자들은 어디 계십니까?”
그 질문에 기한수의 눈빛이 순간 흐려졌다. 주변에 앉아 있던 세 노인도 모두 입을 다물었다.
십여 분쯤 뒤 기한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에는 고통이 가득했다.
“나에게는 두 아들과 네 손자가 있었어. 하지만 모두 죽었지. 윤씨 가문과 여씨 가문은 우리 같은 사람들이 후손을 남기는 것을 원치 않았네. 우리는 선대 대통령에게 너무 깊은 영향을 미쳤기에 언제든 배신할 수 있다고들 여겼어. 그래서 내 아들들은 모두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네 손자 중 성인이 된 아이는 한 명도 없어. 어떤 아이는 익사했고 어떤 아이는 차에 치여 세상을 떠났어. 손녀가 한 명 있었지만 그 아이는 몇 년 전 오빠들이 죽는 걸 보고 내가 멀리 아주 멀리 보냈어. 그 뒤로 귀까지 먹어버려서 살아있는지조차 몰라.”
기한수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늘어뜨린 손은 피가 날 듯 꽉 쥐어져 있었다.
다른 세 노인도 백발이 성성했다. 이들은 모두 선대 대통령을 따라 일했던 사람들이었고 여원훈이 집권한 뒤 심한 탄압을 받았다.
처음엔 가업을 내놓으라고만 했다. 여원훈의 기세가 워낙 강해 가족을 지키려고 어쩔 수 없이 바쳤다. 그러나 내어준 것이 결국 화살이 되어 돌아왔다. 자녀들은 비참하게 죽었고 손자들 가운데 살아남은 이는 아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