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유연준을 만나다
‘이 남자가 왜 여기 있어?’
“권해나?”
남자의 입에서 듣기 좋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권해나는 침묵한 채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5초 뒤에야 입을 열었다.
“아저씨?”
유연준은 권씨 가문과 라이벌 관계에 있는 가문의 후계자로 이제 고작 28살인데도 불구하고 과감한 수단과 뛰어난 사업 안목으로 금방 아버지를 대신해 가문 전체를 책임질 수 있는 리더 자리에까지 올랐다.
권씨 가문과 유씨 가문은 이제껏 비즈니스적으로 많이 부딪혔으며 권재호는 그와 마찰이 생길 때마다 어린놈이 건방지다며 바짝 약이 올라 했다.
권해나는 유연준과 파티나 공식적인 석상에서 몇 번 만난 게 다였기에 그다지 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디를 가든 눈에 띄는 외모라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권해나는 유연준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내가 너한테 아저씨 소리를 들을 만큼 늙지는 않았을 텐데?”
유연준이 눈썹을 끌어올리며 물었다.
“말이 헛나왔어요, 유 대표님.”
권해나는 금방 호칭을 고쳤다.
“여기는 어쩐 일이야?”
유연준의 질문에 권해나는 의아하다는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유연준은 이런 가벼운 인사를 건넬 만큼 성격이 유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친부모님을 찾으러 왔어요.”
권씨 가문의 양녀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대대적으로 알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말 못 할 비밀도 아니었기에 권해나는 솔직하게 답변해 주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유연준은 그 말을 듣자마자 곧장 얼굴을 무섭게 굳혔다.
“그래서 친부모를 찾았으니 너희 집 영감이 너보고 나가래?”
‘갑자기 왜 화를 내?’
권해나가 불쾌하다는 눈빛으로 유연준을 쏘아보았다.
“우리 아빠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요? 여기로 온 건 순전히 제 의지예요.”
그때 웨이터가 다가와 유연준에게 물었다.
“어서 오세요, 대표님. 룸으로 안내해 드릴까요?”
“아까는 룸 없다면서요?”
권해나가 물었다.
“유 대표님은 저희 한식당의 최대 투자자세요. 그래서 항상 유 대표님 전용 룸은 비워두고 있답니다.”
“...”
말문이 막힌 권해나가 이만 나가려는데 유연준이 붙잡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같이 먹어.”
권해나는 그 말에 잠시 망설였다. 권재호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노발대발할 것 같았으니까.
“왜, 너희 집 영감 때문에 그래? 영감이 나랑은 밥도 먹지 말래? 그렇게 안 봤는데 꽤 속이 꽤 좁은 사람이네.”
“우리 아빠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
권해나는 바로 반박하며 그를 째려보았다. 그러고는 웨이터를 향해 얼른 룸으로 안내하라고 했다.
‘비즈니스 할 때야 적이지 사적인 생활에서까지 적대할 필요는 없으니까 밥을 같이 먹는 건 괜찮아. 응, 괜찮아.’
유연준 전용 룸이라 그런지 창밖으로 보이는 경치가 너무나도 예뻤다.
게다가 인테리어 자체도 고풍스러워 훨씬 더 느낌이 있었다.
룸 안으로 들어오니 아까 입구에서부터 났던 은은한 향수 냄새가 조금 더 강해졌다.
달리 할 말이 없어 물만 들이켜고 있던 권해나는 음식이 오르자마자 금방 눈을 반짝였다. 한 입 먹어보니 천상의 맛이 따로 없었다.
“너무 맛있어요!”
유연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
“많이 먹어.”
권해나는 그를 보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아주 맛있게 고루고루 먹었다.
“다른 여자들은 적게 먹는 시늉이라도 하던데 너는 그런 게 전혀 없네?”
“맛있는 걸 앞에 두고 내숭을 왜 떨어요? 음식 아깝게.”
“그렇긴 해.”
권해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가 미소가 살짝 어려있는 유연준의 눈과 마주하고는 순간 멈칫했다.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고 몸이 뜨거워 났다.
평소의 유연준과 너무나도 많이 달랐다.
‘저렇게 웃는 건 반칙 아냐? 무섭게 왜 저렇게 웃어?’
권해나가 젓가락을 멈춘 그때, 휴대폰에 메시지 하나가 날아들었다.
[자기 지금 서강시에 있다며. 나도 일이 생겨서 서강시로 왔는데 같이 밥 먹을래? 문월각에 룸을 잡아뒀어.]
문월각이라면 현재 권해나가 있는 이곳이었다.
[조금만 기다려. 금방 그쪽으로 갈게.]
“친구가 다른 룸에 있대요. 잠깐 얘기 좀 하고 올게요.”
권해나가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으며 유연준을 향해 말했다.
“그렇게 해.”
룸에서 나온 권해나는 친구가 보낸 번호를 따라 어느 한 룸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안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 선생님께 배울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 열심히 해. 알겠지?”
채진숙이 임하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엄마. 저 아시잖아요. 친구가 그러는데 강 선생님이랑 나연 선생님이 서로 친한 사이래요. 나연 선생님도 이번 콩쿠르의 심사위원으로 참석한다고 하셨으니까 이번에야말로 얼굴을 뵐 수 있을 것 같아요!”
임하늘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피아노 업계에서 ‘나연’이라는 이름을 모르면 간첩이라는 얘기까지 들을 정도로 나연은 상당히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다.
하지만 좀처럼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고 올리는 영상도 전부 다 얼굴을 가리고 있어 아무도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고 있다. 집요하다고 이름난 기자들도 그녀의 뒷모습만 알아냈을 뿐 다른 건 알아내지 못했다.
임하늘은 나연이 피아노 치는 영상을 전부 다 봤을 정도로 그녀의 열혈 팬이었기에 이번 콩쿠르가 무척 기대됐다.
“우리 하늘이는 피아노도 잘 치고 착하니까 분명 선생님께서 엄청 좋아하실 거야.”
채진숙은 그렇게 말하며 엉겁결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룸 앞에 서 있는 권해나와 눈이 딱 마주쳐버렸다.
“언니가 왜 여기에... 혹시 나랑 엄마를 따라온 거예요?”
뒤늦게 권해나를 발견한 임하늘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채진숙은 지금 매우 기분이 나빴다. 권해나가 예의가 조금 없기는 해도 나쁜 아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설마 미행할 줄은 몰랐다.
“해나야, 중요한 약속 때문에 여기로 온 거라 할 얘기 있으면 끝날 때까지 밖에서 잠깐 기다려줄래?”
채진숙은 화가 났지만 최대한 꾹 참고 얘기했다.
“강주은을 만나러 오셨어요?”
권해나가 눈썹을 끌어올리며 물었다.
“언니, 선생님 이름을 그렇게 함부로 부르면 어떡해요? 예의가 없어도 너무 없잖아요.”
임하늘이 한 소리 했다.
채진숙도 더는 못 참겠는지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동생 일 방해하지 말고 나가.”
‘가정교육을 대체 어떻게 받았길래 애가 이래? 애초에 받은 적이 있기는 하나?’
그때 룸이 열리고 강주은이 안으로 들어왔다.
강주은은 권해나를 보자마자 활짝 웃었다. 당장 목을 끌어안고 인사를 나누려는데 권해나가 그보다 먼저 딱딱한 말투로 얘기했다.
“중요한 약속인 것 같으니까 오늘은 이만 가볼게요.”
말을 마친 후 권해나는 조금의 미련도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강주은이 어떻게 된 일인지 상황을 파악하려는데 임하늘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자리로 이끌었다.
“죄송해요, 선생님. 저희 언니인데 선생님이랑 식사하기로 했다니까 질투가 나서 몰라 따라왔나 봐요. 저랑 엄마가 한 소리 했으니까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뭘 잘 모르는 언니거든요.”
“질투?”
강주은은 재밌는 얘기를 들었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임하늘 씨를 질투할 이유가 뭐가 있죠? 심사위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