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윤서하는 이틀 동안 병원에서 지냈다.
왼손 전체에 큰 화상을 입어 두껍게 붕대를 감은 채였고 조금만 움직여도 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동안 강도현은 기자회견 후 처리해야 할 일들에 묶여 병원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부하를 시켜 장미 한 다발과 안개꽃 한 다발을 보냈다.
둘 다 대학 시절 윤서하가 좋아하던 꽃이었다.
하지만 그건 진짜 이유가 아니었다.
윤서하가 그 꽃들을 좋아하게 된 건, 강도현이 좋아한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강도현이 장미 향을 좋아했던 이유도, 결국 배서연이 늘 장미 향수를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걸 이제는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며 윤서하는 꽃을 내려다보다가 아무리 화려한 꽃이라도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아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셋째 날.
그 날은 윤서하의 생일이자, 드디어 해외 이민 절차가 완료된 날이었다.
윤서하는 병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 짐을 챙겼다.
강도현은 집에 없었다.
며칠째 들어오지도 않았다는 가사도우미의 말에도 윤서하는 더 이상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침실로 들어가 결혼반지를 조심히 빼내어 침대 머리맡에 두었다.
그리고 캐리어 손잡이를 잡아 끌며 조용히 집을 나섰다.
문을 나서는 순간, 눈앞에 차 한 대가 서더니 배서연이 내려왔다.
배서연은 마치 오랜만에 반가운 사람을 만난 듯 미소를 지었다.
“오늘 떠난다는 거 알아. 마지막으로 인사하러 왔어.”
눈빛이 싸늘하게 굳은 윤서하는 입술을 꼭 깨물며 배서연에게 다가가 말했다.
“축하해요. 정말 멋지게 이겼네요. 오늘 제가 보낸 이혼 서류가 강도현 씨의 손에 도착할 거예요. 서명만 하면, 저희 부부 관계는 끝입니다. 이제 아무도 두 사람 사이를 막지 않겠죠. 더 이상 제 눈치 보며 숨길 필요도 없고요. 마음껏 사랑하세요. 그리고 부탁인데... 제 삶에 다시는 끼어들지 말아 주세요. 저와 강도현의 결혼은 평생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거예요. 우리 사이의 과거는 모두 지워질 거고, 윤씨 가문과 강씨 가문은 앞으로도 계속 원수로 남겠죠.”
말을 마친 윤서하는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고 배서연의 옆을 지나쳐 갔다.
뒤에서 배서연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고마워. 알아서 물러나 줘서.”
그 순간, 윤서하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 하지만 곧 울음을 삼키듯 입술을 깨물고 택시에 올라탔다.
택시가 출발하던 바로 그 순간, 마침 강도현의 벤틀리가 골목으로 들어왔다.
두 차량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스쳐 지나갔다.
윤서하는 차창 밖으로 강도현을 바라보았지만, 강도현은 그녀의 존재를 느끼지 못한 채 집 안으로 급히 차를 몰아 넣었다.
윤서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머릿속에 스쳐 가는 것은 단 한 번의 행복했던 기억도 아니었다.
오직 강도현이 배서연을 위해 뛰어갔던 수많은 순간들뿐이었다.
배서연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는 의심을 받았을 때, 강도현은 배서연을 위해 아버지의 매를 대신 맞았다.
폭우 속에서 배서연을 위해 무릎을 꿇고 밤을 지새웠다.
배서연이 급성 장염으로 응급실에 실려 갔던 날에는 윤서하가 같은 병원에서 시술을 받고 있음에도 윤서하의 손을 놓고 단숨에 배서연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윤서하의 생일은 무려 7년 동안 단 한 번도 함께 있어 준 적이 없었다.
매년 그날이 되면 배서연의 전화 한 통이면 강도현은 서둘러 떠났다.
윤서하는 씁쓸한 웃음을 터뜨렸다.
웃다 보니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건 마지막이야. 다시는 이 사람 때문에 울지 않을 거야.’
올해 생일에는 윤서하는 단 한 순간도 강도현을 기대하지 않기로 마음먹었고 마침내 스스로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 어떤 선물도, 기대도 다시는 바라지 않았다.
바로 그때 메시지가 도착했다.
보낸 사람은 강도현이었다.
“오늘 네 생일이지? 내가 준 열쇠로 옷장 서랍 열어 봤어? 깜짝선물이 있을 거야.”
윤서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물을 닦고 강도현의 번호를 차단했다.
이어 모든 연락처를 지우고 휴대폰에서 SIM 카드를 빼내 그대로 두 동강 냈다.
공항에 도착한 윤서하는 캐리어를 끌고 천천히 게이트 쪽으로 걸어갔다.
윤서하는 고개를 들어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따라 햇빛이 눈부시게 맑았다.
깊게 숨을 들이쉬며 윤서하는 처음으로 자유가 어떤 느낌인지 느낄 수 있었다.
‘잘 있어요. 강도현 씨, 이제 정말 다시는 안 볼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