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그것은 은사님의 유작인 <봄비>였다. 익숙한 필 촉에 문성아는 임종 전 은사님의 깡마른 손이 떠올랐다.
기억 속 은사님은 늘 자애롭게 문성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성아야, 이 그림은 내가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서 그린 거다...”
은사님이 돌아가시고 사모님은 종일 눈물만 흘렸다. 이 그림을 손에 넣는다면 은사님을 향한 사모님의 그리움을 조금은 달래줄 수 있을 것 같았다.
“10억.”
문성아가 값을 불렀다.
“오빠...”
그때 소유희가 안도혁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이렇게 말했다.
“그림 너무 예쁘다.”
그러자 안도혁이 바로 가격을 올렸다.
“20억.”
문성아가 이를 악물고 따랐다.
“40억.”
“60억.”
가격이 치솟자 경매장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문성아는 곁눈질로 정사언을 포함한 세 사람이 몰래 번호판을 내리는 걸 보았다. 아마도 소유희가 그 그림을 원해서 그러는 것 같았다.
‘참 우습기도 하지.’
10분 전까지만 해도 호언장담하던 그들이었다.
“성아 네가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다 사줄게.”
손가락이 살을 파고 들어갈 정도로 주먹을 불끈 쥔 문성아가 다시 번호판을 들었다.
“100억.”
“160억.”
“200억.”
결국 안도혁은 그 어떤 가격을 제시하든 그것보다 더 높은 가격을 제시하겠다고 선포했다. 그러더니 긴 다리로 레드카펫을 가로질러 카드를 긁으며 얼굴이 하얗게 질린 문성아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성아야. 슬퍼하지 마.”
정사언이 얼른 위로를 건넸다.
“저 그림이 그렇게 좋으면 비슷한 그림이 있는지 물어보고 나오면 바로 사줄게...”
“나도.”
하은수도 맞장구를 쳤다.
“나도 빠질 수는 없지.”
강지환이 질세라 이렇게 말했다.
세 사람은 그렇게 문성아의 시야에서 점점 멀어졌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문성아는 씁쓸한 마음을 뒤로한 채 그들에게 에워싸인 소유희에게로 걸어갔다.
“가격 불러.”
문성아의 목소리는 무서울 정도로 차분했다.
“5배, 10배, 20배도 좋아.”
소유희가 가볍게 웃으며 오만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가씨도 이럴 때는 어쩔 수 없나 봐요.”
소유희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눈을 깜빡이며 온갖 순진한 척은 다 했다.
“돈이 만능은 아니잖아요. 정말 갖고 싶으면 무릎 꿇고 빌어요. 그러면 줄게요.”
이 말에 문성아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남자들 앞에서는 물 한 병도 직접 따지 못할 만큼 가녀린 척하면서 문성아 앞에만 서면 오만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보이는 게 너무 역겨웠다.
이는 전생에 문성아가 도무지 소유희에게 마음을 주지 못한 이유기도 했다. 사실 아직도 이 남자들이 왜 소유희를 좋아하는지 알 수 없었다.
문성아가 주먹을 불끈 쥐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말했지. 돈은 문제가 안 된다고.”
“무릎 꿇는 걸 보고 싶다면 어떡할래요?”
소유희가 달콤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면...”
문성아의 눈길이 소유희가 아무렇게나 들고 있는 그림으로 향했다. 은사님의 유작이기도 했고 사모님의 그리움이 담긴 그림인데 나이도 많은 사모님이 종일 눈물만 흘릴 걸 생각하면 문성아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래. 무릎 꿇을게.”
결국 문성아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얇은 드레스는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서 전해진 한기를 막아주지 못했다. 문성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무서울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넘겨줄 거야?”
소유희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깊은 악의가 담겨 있었다.
촤락.
소유희는 문성아가 보는 앞에서 액자 그림을 찢어버렸다. 귀청을 때리는 그 소리는 조용한 경매장에서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너 정말.”
화가 난 문성아가 소유희의 뺨을 후려갈겼다.
“문성아.”
순간 안도혁의 목소리가 경매장에 울려 퍼졌다.
“너 뭐 하는 거야?”
“도혁 오빠...”
소유희가 얼굴을 움켜잡고 눈물을 흘렸다.
“아가씨 잘못 아니에요. 오빠와 경매장에 오는 게 아니었는데... 다 내 잘못이에요...”
소유희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안도혁의 옷자락을 잡고 적당한 목소리로 울먹였다.
“아가씨 도혁 오빠 좋아하잖아요. 그런데 나를 위해 이렇게 많은 걸 사줬으니 화내는 게 맞죠. 내 존재가 민폐라는 거 알아요...”
소유희가 안도혁을 밀어내며 뒷걸음질 쳤다.
“그런 거라면 차라리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지겠어요.”
그러더니 몸을 돌려 무서운 속도로 통유리를 향해 달려갔다.
“유희야.”
안도혁의 부름이 경매장을 가득 메웠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쨍그랑.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무거운 물체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문성아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창문가로 다가가 보니 소유희는 날개가 꺾인 나비처럼 조용하게 피 못에 쓰러져 있었다. 다만 입꼬리는 원하는 걸 이룬 듯 기괴한 각도로 올라가 있었다.
안도혁은 완전히 미쳐버렸다. 눈이 빨갛게 충혈돼서는 피못에 쓰러진 소유희를 안고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문성아를 병원으로 끌고 가.”
그러더니 문성아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말했다.
“문성아. 지금부터 유희가 무사하길 빌어야 할 거야. 유희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날에는 너도 죽어.”
병원, 하얀 불빛이 복도를 밝게 비췄지만 시간이 멈춘 듯 삭막하기만 했다.
의사가 허겁지겁 달려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출혈이 심해서 수혈해야 하는데 특수 혈액형이라 병원에 비축된 혈액이 없는 상태입니다...”
안도혁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칼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문성아를 쏘아봤다.
“너도 특수 혈액형이잖아.”
“아니요...”
병상에 누운 소유희가 겨우 눈을 뜨고는 이렇게 말했다.
“다 내 잘못이에요. 아가씨 빈혈인데 수혈하면 안되죠...”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다른 사람 걱정을 해. 유희야. 너는 착해서 탈이야.”
안도혁이 얼른 소유희의 손을 꼭 잡아주며 놀란 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다. 다만 문성아를 향한 시선은 빙하수처럼 차갑기 그지없었다.
“들어와.”
이 말에 보디가드가 우르르 들어왔다.
“묶어.”
“안도혁. 그러기만 해봐.”
“내가 못 할 줄 알고?”
거칠게 수술대로 던져진 문성아는 온몸에 한기가 맴돌았다. 미친 듯이 발버둥 치는 바람에 옆에 놓인 수술 도구 진열대가 바닥에 쓰러졌다.
“눌러.”
안도혁이 큰소리로 호통치자 서너 명의 보디가드가 힘껏 문성아의 팔다리를 눌렀다. 머리가 헝클어진 문성아는 몸부림치다가 드레스가 찢어져 하얀 어깨가 밖으로 훤히 드러났다.
“안도혁.”
문성아가 처절하게 그 이름을 불렀다. 전에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절망스러운 목소리였다.
“너 후회하게 될 거야...”
“후회하게 될 사람은 너야.”
안도혁이 차갑게 웃으며 직접 바늘을 문성아의 혈관에 꽂아 넣었다. 빨간 피가 튜브를 따라 몸에서 빠져나가자 문성아는 점점 의식이 흐릿해졌다.
순간, 문성아는 비바람이 몰아치던 전생의 그 밤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눈이 부신 전조등과 급브레이크를 밟는 날카로운 소리, 그리고 길 맞은편에서 바닥에 쓰러진 그녀를 바라보던 네 사람의 차가운 눈빛까지 생생했다.
오직 이준서만이, 어릴 적부터 앙숙인 이준서만이 비를 뚫고 달려와 떨리는 손으로 짓뭉개진 문성아를 품에 끌어안았다.
“이준서...”
문성아가 차가운 수술대에 누워 피눈물을 흘렸다.
“너 언제 와...”
‘보고 싶은데...’
문성아의 목소리가 점점 꺼져들어가더니 차가운 공기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