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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별장의 도우미들은 이미 모두 잠자리에 들었고 넓은 거실에 구진성과 심가연 단둘만 남았다. 심가연은 그가 무슨 말을 꺼낼지 몰라 공손하게 옆에 서서 기다리면서 손끝으로 옷자락을 꽉 쥐었다. 구진성은 고분고분한 태도의 그녀를 보며 싸늘하게 웃었다. “사람 일은 참 모르는 거예요. 그렇죠?” 그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 조롱이 섞여 있었다. “2년 전에 그렇게 콧대가 높던 심가연 씨가 고개를 숙일 줄 누가 알았겠어요.” 심가연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희미한 조명 아래 긴 속눈썹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지난 2년간 그녀의 초라한 삶을 비웃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현재 구진성은 그녀의 상사이자 딸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어떤 굴욕을 당하든, 무슨 일을 하든 그녀는 기꺼이 감수할 것이다. 계속 화도 내지 않고 가만히 있는 심가연의 모습에 구진성의 눈빛이 갑자기 차가워지더니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끌어당겼다. “으악.” 심가연은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나머지 중심을 잃고 그의 따뜻하고 단단한 품에 넘어졌다. 뜨거운 체온이 얇은 실크 잠옷을 통해 전해졌고 은은한 향까지 어우러져 저도 모르게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일어나려 버둥거렸지만 구진성이 단단히 붙잡은 바람에 꼼짝할 수가 없었다. “대표님, 뭐... 뭐 하시는 겁니까?” 심가연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손끝으로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려 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구진성이 고개를 숙이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칠흑같이 어두운 두 눈에 위험한 기운이 감돌았다. “심가연 씨.”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낮고 차가웠다. “순종적인 척한다고 내가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요?” 순간 멈칫한 심가연은 그를 밀어내려 애썼다. “대표님, 오해하신 것 같은데요...” 몸부림치던 그때 심가연이 움찔했다. 일부러 그런 건지 아니면 우연인지 구진성의 손이 그의 아들의 ‘식량 창고’에 닿았다. 구진성이 멍해진 틈을 타 심가연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소파 반대편으로 황급히 도망쳤다. “대표님, 자중하세요!” 구진성은 넋이 나간 얼굴로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부드러운 감촉이 여전히 남아 있었고 알 수 없는 짜증이 마음을 뒤덮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난 남의 와이프한테 관심 없어요.” 혐오스럽다는 듯 손을 거두며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경멸 어린 눈으로 훑었다. 그러고는 핸드폰을 들어 뉴스를 확인했다. 그의 말에 심가연은 심장이 뭔가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 구진성은 이제 그녀를 증오했다. 만약 그녀와 임준석이 명목뿐인 부부라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더 심하게 조롱할 것이다. “대표님, 더 할 말씀 없으시면 전 이만 작은 도련님 돌보러 가겠습니다.” 그녀가 나가려던 그때 뒤에서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연 씨 딸 무슨 병에 걸렸어요?” 심가연은 걸음을 멈추고 입술을 적셨다. 목소리가 깃털이 떨어지듯 가벼웠다. “대표님과 상관없는 일이에요.” 쾅.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구진성이 화를 내며 핸드폰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가연 씨는 지금 내 아들의 보육사예요. 가연 씨 딸의 생사가 내 아들이 굶느냐 마느냐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데 나랑 상관없는 일이라고요?” ‘결국은 아들 때문에 유이를 신경 썼던 거였구나... 내가 괜한 생각을 했네.’ 심가연은 구진성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하며 낮게 대답했다. “총폐정맥 환류 이상.” 구진성은 잠깐 멈칫했다가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심장병이란 말이에요?” 유이 얘기에 심가연의 눈시울이 또다시 붉어졌다. 하지만 침착하려 애썼다. “네. 선천적인 거예요.” 구진성은 살짝 흔들린 듯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수술하지 않으면 12개월 정도 됐을 때 울혈성 심부전으로 죽을 수도 있을 텐데...” 그 말을 할 때 구진성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심가연은 그가 이 병에 대해 이렇게 잘 알 줄 몰랐다. 놀라 고개를 들자 그의 알 수 없는 눈빛과 마주쳤다. “재호도 그 수술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그의 덤덤한 대답에 심가연은 다시 멈칫했다. ‘재호도 같은 병을 앓았다니...’ 그러고는 바로 깨달았다. ‘구진성의 유전자가 문제 있어서 그런 게 분명해. 그래서 내 아이든 지금 와이프랑 낳은 아이든 모두 같은 심장병을 앓는 거라고.’ 심가연의 두 눈에 갑자기 분노가 스친 걸 본 구진성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한참이 지나도 그녀가 부탁하지 않자 구진성의 안색이 점점 굳어졌다. “왜 나한테 도와달라고 안 해요?” 정신을 차린 심가연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물었다. “왜 대표님한테 도와달라고 해야죠?” “허허.” 구진성이 서늘하게 웃었다. “수술 민수가 직접 집도했어요. 민수한테 딸 수술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지 않아요?” “진민수 씨가 유이 수술해줄 수 있게 도와줄 거예요?” 가능하다면 당연히 진민수 같은 전문가가 유이의 수술을 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구진성이 쉽게 허락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녀를 증오하니까. “흥.” 구진성이 싸늘하게 웃었다. 심가연을 쳐다보는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내가 왜 도와줘야 하죠? 단지 가연 씨랑 잤었다는 이유로?” “...” ‘도와줄 생각이 없으면 가만히 있을 것이지, 왜 사람을 모욕하고 그래?’ 진민수 같은 최고의 전문가가 집도하면 좋겠지만 안 된다면 유이의 주치의가 수술해도 괜찮았다. 지금은 치료비를 모으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대표님, 시간이 늦었어요. 일찍 주무세요.” 심가연은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물러섰다. 그런데 구진성은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 다시 물었다. “딸의 치료비 때문에 이 일에 지원한 거죠?” 그의 목소리가 한없이 차가워서 감정을 읽기 어려웠다. 그녀는 그의 옆모습을 힐끗거렸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허.” 뭔가 생각났는지 피식 웃더니 심가연을 올려다보면서 경멸 섞인 말투로 말했다. “임준석은요? 자기 딸이 죽게 생겼는데 고작 몇천만 원도 내놓지 않겠대요?” 심가연은 말없이 얼굴을 돌렸다. 그 행동은 구진성의 심기를 완전히 건드리고 말았다. 그녀를 소파 등받이에 세게 밀어붙이고는 긴 다리로 무릎 사이를 파고든 다음 등에 바짝 붙었다. 뜨거운 숨결이 심가연의 귓가에 닿았다. “심가연 씨, 그때 날 버린 게 고작 딸 목숨도 신경 안 쓰는 인간쓰레기 때문이었어요?” 뼈마디가 선명한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잡아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 후회해요?” 심가연은 고개를 들고 구진성의 분노에 찬 두 눈을 물기 어린 눈동자로 쳐다봤다. 두 사람의 숨결이 얽힌 순간 공기 중에 위험하면서도 은밀한 기운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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