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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진심

성주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갑작스럽게 반항하는 딸을 감당하기 벅차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엄마가 이렇게 하는 건 다 널 위해서야. 네가 내 딸인데 엄마가 너를 해치기라도 하겠어?”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한 성주희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정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고 이젠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 같았다. 송찬혁은 우리의 다툼에 끼어들지 않고 조용히 듣기만 했다. 이럴 때면 유독 침묵에 능했다.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밤 풍경을 보면서 한참을 생각한 끝에 나는 마음에 담아두었던 말을 꺼냈다. “엄마, 내가 주서훈이랑 결혼해서 칠팔 년이 지나도 주서훈이 윤소민의 전화 한 통에 언제든지 달려가고 사람들이 날 손가락질해도 괜찮아요? 그러다가 나중에 주서훈의 아이를 가진 채 찾아다니다가 길에서 죽어도 정말 괜찮아요? 말해보니 그것도 괜찮네요. 주서훈한테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내가 죽은 뒤에 엄마 아빠는 잘 보살펴주겠죠.” 지난 생에 교통사고를 당하고 아이가 내 몸에서 사라지는 그 느낌이 떠오르자 마음이 점점 차갑게 식어갔다. 성주희는 내 말을 듣고 몸을 움찔 떨었다. 그녀의 시선이 나에게 꽂히더니 목소리가 갑자기 날카로워졌다. “송은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 엄마는 그런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어. 엄마가 하는 모든 건 다 너를 위한 거라고. 그리고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아. 혼자 괜한 걱정 하지 마. 요즘 애들 소설을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야? 너도 뭐 봤어?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성주희가 웬일로 평소보다 말을 많이 했다. “현실은 소설이랑 달라. 엄마가 짜준 대로만 하면 돼. 엄마는 네 엄마니까 절대로 널 해치지 않아.” 차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입을 다물었다. 집에 도착한 후 송찬혁은 차에서 내리지도 않았다. 성주희가 최근 마음에 둔 호스트가 나와 그녀를 맞이했다. 남자는 집사 복을 차려입은 채 인사를 건넸다. “사모님, 아가씨, 오셨어요?” 말하면서 성주희의 옆으로 다가가 은근슬쩍 허리를 감싸 안았다. “가만히 있어. 애도 옆에 있는데.” 내가 들을까 봐 목소리를 낮췄는데도 다 들렸다. 뒤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송찬혁도 애인과 함께 사는 집으로 갔을 것이다. 엉망진창인 집을 보며 나는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입으로는 나를 위한다면서 정작 본인의 삶은 이 모양이라니. “엄마, 이게 정말 엄마가 원하는 모습이에요?” 나는 성주희가 남자의 팔짱을 끼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질문을 던졌다. 성주희가 화난 얼굴로 돌아봤다. 나의 말에 찔린 게 분명했다. 그녀는 나를 위아래 훑어보며 말했다. “방에 들어가서 공부나 해. 아까 차에서 엄마가 한 말은 전부 진심이니까 잘 생각해봐. 지금은 이해 못 해도 나중엔 알게 될 거야.” 나는 대꾸하지 않고 성주희의 옆에 서 있는 남자를 쳐다봤다. 잘생긴 얼굴에 키도 훤칠한 게 꽤 괜찮았다. 게다가 성주희를 기분 좋게 해주는 데도 아주 능숙해 보였다. ‘업무 능력’만큼은 수준급인 듯했다. ‘엄마는 저런 말을 할 때 우습지도 않은가 봐? 아니면 내가 엄마를 본받기를 바라서 이러나?’ 그러고 보니 만약 내가 지난 생에 좀 더 일찍 마음을 정리하고 주서훈과 각자 갈 길을 갔더라면 모든 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현관 앞에 한참 서 있다가 춥다는 생각이 들고서야 나는 머릿속의 잡념들을 털어내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직 밤 열 시라 두 시간 정도는 더 공부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지식 포인트를 처음부터 다시 훑어봤다. 지금 내 머릿속의 더러운 것들을 씻어낼 수 있는 건 오직 지식뿐이었다. 다음 날 아침 남자 집사가 식탁 옆에 곧은 자세로 서 있었다. 도무지 아침을 먹을 기분이 아니었던 나는 성주희가 부르는 것도 무시한 채 학교로 향했다. 학교에 도착해보니 누군가 내 책상을 뒤졌는지 엉망이 돼버렸다. 나는 사진을 찍은 다음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연습문제집 한 권이 사라져 있었다. 고개를 들자마자 윤소민의 도발적인 눈빛과 마주쳤다. ‘혹시 누가 훔쳐 갔나?’ 오후 첫 두 교시는 체육 수업이었다. 수능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지만 학교에서는 건강을 중요시했기에 체육 수업을 빼놓지 않았다. 다만 스트레칭 후에는 자유 활동이었다. 교실에만 있지 않으면 뭘 하든 상관없었다. 수업 시작 전 나는 윤소민이 배를 감싸 안고 체육부장에게 다가가 쉬겠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나 배가 너무 아파서 그러는데 교실에 있으면 안 될까?” 그녀의 껌딱지도 나서더니 옆에서 윤소민을 돌봐주겠다고 했다. 체육부장도 여학생이라 여자들의 특별한 날을 잘 알고 있었기에 더는 캐묻지 않았다. 스트레칭이 끝난 후 나는 구석진 곳으로 가서 조금 전 챙겨온 연습문제집을 벤치에 놓았다. 체육 시간을 이용해 문제를 몇 개 더 풀 계획이었다. 그런데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박유현이 나를 찾아왔다. “은솔아, 네가 여기 있을 줄 알았어.” “오늘도 애들이 너랑 농구 안 해줘?” 박유현이 농구를 좋아했지만 실력이 별로였다. 정말로 사람이 없을 때나 그에게 같이 농구하자고 했다. “지금 농구할 시간이 어디 있어. 빨리 나랑 농구 보러 가자.” 나는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박유현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비록 예전에 체육 시간마다 미리 물 한 병을 사 들고 농구장 옆에서 주서훈을 응원했지만 회귀한 후 한 번도 가지 않았다. 박유현이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가서 주서훈을 보라는 게 아니라 아까 어떤 선배가 학교에 왔는데 주서훈이 갑자기 그 선배를 붙잡고 실력을 겨루자면서 시비를 거는 거야.” 박유현은 성격이 밝고 쾌활했다. 하도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내서 내가 끼어들 틈도 없었다. “그 선배가 공부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운동신경도 엄청 좋아. 공을 다루는 솜씨가 주서훈이랑 막상막하더라고.” 주서훈이 어릴 때부터 농구를 좋아해서 가족들은 특별히 NBA 코치까지 붙여줬었다. 그래서 학교에서 그의 농구 실력을 따라올 자가 없었다. 나는 별로 흥미가 없었다.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을 보며 젊음이 참 좋다는 생각을 했다. ‘쉴 때도 이렇게 에너지가 넘치다니. 난 책 한 권을 껴안고 구석에서 쉬는 게 전부인데.’ “안 가. 가려면 너 혼자 가.” “에이, 가자. 너도 머리 좀 식혀야지. 효재 선배가 어쩌다가 학교에 왔단 말이야. 내가 벌써 자리를 맡아놨어. 안 그러면 우리가 구경할 자리도 없어.” 박유현은 오늘 나를 무조건 끌고 가겠다는 기세였다. 효재 선배라는 소리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박유현이 옆에서 계속 재잘거렸다. “효재 선배가 오랜만에 학교에 왔는데 정말 안 갈 거야? 맨날 잘생긴 나만 봐도 괜찮겠어? 선배도 나처럼 엄청 잘생겼어. 나랑은 또 다른 스타일인 미남이거든. 너도 취향 좀 바꿔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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