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임효재
성주희가 잔을 높이 들더니 눈부실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우리 은솔이는 마음이 순수해서 어릴 때부터 서훈이밖에 몰랐어요. 이제 아이들도 다 컸으니 슬슬 약혼시켜야죠.”
주변에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수많은 시선이 나에게 쏟아졌는데 탐색하는 듯한 눈빛과 묘한 기대를 담은 눈빛이었다.
손에 쥔 잔에서 전해지는 냉기에 온몸이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설마 이번에도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야?’
“은솔 양, 안색이 별로 안 좋은데 먼저 가서 쉴래요?”
임효재가 떨리는 나의 어깨를 잡아주었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가 나를 현실로 이끌었다.
간신히 얻어낸 두 번째 기회인데 고작 몇 마디 말 때문에 다시 절망적인 생각에 빠져서야 하겠는가?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저었다.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손바닥을 꽉 꼬집었다.
“괜찮아요. 잠깐 다른 생각 했었어요. 미안해요.”
나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주서훈에게로 향한 그때 마침 그의 시선도 나를 향해 있었다.
나와 멀지 않은 곳에 서서 샴페인 잔을 흔들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나의 어깨를 잡고 있는 임효재의 손에 머물렀다. 찰나였지만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친 듯했다.
성주희의 말을 주서훈이 듣지 못했을 리 없었다.
하지만 미간만 살짝 찌푸릴 뿐 바로 부인하지 않았다. 나를 쳐다보는 눈빛에 내가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지난 생에 보여줬던 냉정함이 아니라 의미심장함이었다.
“서훈 군이랑 은솔 양은 정말 천생연분이죠.”
처음 보는 대머리 부자가 술잔을 들고 주서훈에게 건배를 청했지만 주서훈은 잔을 든 채 그를 피해버렸다.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언급했으니 주서훈이 알아서 반박하겠지.’
그런데 주서훈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덤덤하게 내뱉었다.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표님. 은솔이가 서울대에 가고 싶어 해서 저희 둘 모두 학업에만 매진하고 있거든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이 말은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에 충분했다.
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나를 그토록 혐오했던 주서훈이 왜 이 중요한 순간에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이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학업에 매진하는 건 좋은 일이지.”
성주희는 기회를 놓칠세라 재빨리 말을 이었다.
“하지만 마음까지 미뤄서야 하겠어? 듬직한 너한테 우리 은솔이를 맡기면 부모로서도 안심이 돼.”
주변의 시선이 어찌나 뜨거운지 나를 불 위에 올려놓고 굽는 것만 같았다.
성주희가 가식적으로 웃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은솔아, 뭘 그렇게 쑥스러워해? 서훈이가 저쪽에서 널 기다리고 있어.”
성주희의 눈빛에 담긴 경고를 보았지만 이번에는 움츠러들 생각이 없었다.
“이모, 저 작년에 서울대에 합격했거든요. 방금 제가 아는 교수님을 만났는데 은솔 학생이랑 잠시 인사하러 가도 될까요?”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옆에서 임효재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상황을 정리해주다니...’
내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임효재가 눈을 깜빡였다.
“그래, 그럼.”
성주희는 역시나 주씨 가문 사람들에게 내가 인기 있다는 인상을 심어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나는 즉시 이 기회를 이용해 임효재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그러다가 주서훈의 옆을 지나갈 때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서두른 바람에 그가 내 손을 잡으려 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서훈아, 나 좀 답답해서 그러는데 잠깐 밖에 나가 바람 쐴까?”
뒤에서 윤소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긴 했지만 돌아보진 않았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임효재가 소개해준 교수가 마침 서울대 입시를 총괄하는 분이라 입시 정책과 가산점 제도에 대해 아주 빠삭했다.
교수와의 대화 덕분에 나는 잠시나마 연회에서 있었던 불쾌한 일을 잊을 수 있었다.
임효재의 도움으로 교수는 내가 던진 학술적인 질문들에 호감을 보였고 나중에 궁금한 것이 있으면 연락하라면서 명함까지 줬다.
헤어지기 전 임효재가 다정하게 말했다.
“은솔 양은 목표가 명확해서 아주 좋아요. 남들이 뭐라 떠들어대든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그러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은솔 양은 스스로 빛을 발할 줄 아는 사람이에요.”
나는 진심 어린 미소와 함께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마워요, 효재 군. 이건 좀 말하기 창피한 건데 사실 날 이렇게 칭찬해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전생의 나는 늘 누군가의 부속품이었고 남의 연애에 끼어든 악녀 취급을 받았다. 나의 노력이나 빛나는 면모를 인정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 그냥 말 놓을까? 편하게 이름 불러.”
임효재가 먼저 말을 놓았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무테안경을 고쳐 쓰더니 말을 바꿨다.
“아니면 선배라고 부르든지. 나 너랑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야. 한 기수 선배일 뿐이고. 앞으로 또 동문으로 만날 수도 있어.”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선배.”
나도 자연스레 말을 놓았다. 남은 연회 시간을 거의 임효재와 함께 보냈다.
내가 서울대 진학을 목표로 한다는 걸 알게 후 임효재는 자신의 수능 경험담과 다채로웠던 서울대 생활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지난 생에 나는 주서훈밖에 몰랐다. 대학 입시에 실패한 나는 주서훈의 대학교가 있는 곳에서 아무 대학교나 골라 지원했다.
그렇게 대학 생활 내내 두 학교를 오가면서 그만 쫓아다녔다.
임효재가 말한 대학 생활은 내가 겪어본 적이 없는, 지금 내가 간절히 바라는 생활이다.
“네가 한 달 안에 이 고등학교에서 전교 30등을 했다는 건 기본 실력이 있다는 뜻이야. 마지막 한 달만 전력으로 공부하면 서울대에 충분히 합격할 수 있어.”
“커닝해서 전교 30등 한 주제에 서울대는 무슨.”
윤소민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나는 그제야 그녀가 줄곧 내 옆에 있었다는 걸 알아챘다. 주변을 둘러봤는데 주서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샴페인 잔을 꽉 쥐었다. 두 눈에 혐오감이 스쳤다.
옆에 서 있던 임효재가 무의식적으로 반걸음 물러서더니 나의 앞을 막아서며 나를 감싸주었다.
“이봐. 증거 있어? 남의 노력을 근거 없이 깎아내리는 게 실례라는 거 몰라?”
윤소민이 임효재와 아는 사이임이 분명했다. 임효재가 망설임 없이 나를 감싸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듯 예쁜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시무룩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숙인 채 귀 옆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 연약한 척했다.
“선배,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송은솔 쟤 예전에 성적이 계속 바닥이었는데 갑자기 전교 30등이 됐어. 이상하지 않아? 게다가 며칠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증거도 내놓지 않았다고.”
“이상하다고 해서 마음대로 죄를 뒤집어씌워선 안 되지.”
나는 임효재의 뒤에서 한걸음 앞으로 나와 윤소민을 똑바로 쳐다봤다. 이번에는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윤소민, 법정에서도 뭔가를 주장하려면 증거가 있어야 해. 내가 커닝했다고 생각한다면 CCTV 영상이든 뭐든 증거를 내놓아 봐. 그런데 증거가 없다면 남의 노력을 함부로 깎아내리지 마.”
주변 사람들이 힐끔거리기 시작했고 웅성거리는 소리도 커졌다.
성주희가 황급히 다가와 억지 미소를 쥐어짜며 분위기를 수습했다.
“소민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은솔이가 요즘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는지 우리가 다 봤어. 성적이 오른 건 좋은 일이 아니야?”
겉으로는 윤소민을 탓했지만 두 눈은 빠르게 나를 스쳐 지나갔다. 눈빛에 이런 자리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말고 주씨 가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의 뜻이 다분하게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