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오해
그 순간 나는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성주희는 모든 걸 다 알고 있었다. 주서훈이 좋아하는 사람이 윤소민이라는 것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생에서도 나를 주서훈에게 보내려 했다.
그녀의 말에 윤소민은 더욱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를 힐끗 쳐다봤다.
“정말요? 그런데 전 은솔이가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는 모습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맨날 서훈이만 쫓아다니던데요? 서훈이가 싫다는데도 끈질기게 쫓아다니는 거 있죠?”
윤소민이 몇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목소리를 낮추긴 해도 주변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는 정도였다.
전생의 나였더라면 성주희의 뜻대로 꾹 참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개교 축제 이후로 주서훈이랑 연회에서 딱 두 번 마주친 게 전부야. 그 외에 학교에서는 말도 섞지 않았었고. 윤소민, 대체 내가 언제 주서훈을 쫓아다녔다는 거야? 오히려 너야말로 주서훈이랑 자주 붙어 다니던데. 증거가 있긴 있어?”
나는 전혀 위축되지 않고 윤소민을 몰아붙였다. 윤소민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해지더니 연신 뒷걸음질 쳤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누가 보면 엄청나게 억울한 일이라도 당한 것으로 오해할 정도였다.
“난 그저... 이상하단 생각에... 어쨌거나 예전에 너의 성적이...”
“예전에 성적이 낮다고 해서 지금도 그렇다고 단정해선 안 되지. 미래도 마찬가지야.”
나는 윤소민의 말을 가차 없이 잘랐다.
“윤소민, 계속 나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뜨린다면 경찰에 신고하는 수가 있어.”
윤소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내가 이렇게 반박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게 분명했다. 그녀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문 쪽을 힐끗거렸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마침 밖에서 들어오던 주서훈이 우리 쪽을 쳐다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서훈아.”
윤소민은 구세주라도 찾은 것처럼 주서훈에게 쏜살같이 달려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이제야 왔어? 은솔이가...”
“내가 뭐?”
나는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목소리가 크진 않았지만 모두에게 선명하게 들릴 정도였다.
“효재 선배랑 수능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데 윤소민이 갑자기 달려와서는 내가 커닝했다는 둥 맨날 너만 쫓아다녔다는 둥 그러는 거 있지? 윤소민, 혹시 모든 사람이 너처럼 남의 일을 신경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성주희가 급히 내 팔을 잡아당겼다.
“은솔이 너 오늘 왜 이렇게 예민해? 헛소리 좀 하지 마.”
“이모, 은솔이 오늘 헛소리하지 않았어요. 방금 저랑 얘기를 나눴는데 은솔이의 문제 풀이 사고방식이 매우 명확했고 기본 지식도 탄탄하더라고요.”
나는 흔들림 없이 내 편이 되어주는 임효재에게 고맙다는 미소를 지었다.
주서훈을 돌아보았을 때 그의 두 눈에 찰나의 놀라움의 스치더니 이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윤소민은 그의 옆에 서서 팔짱을 낀 채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그의 귓가에 대고 뭐라 속삭였다.
주서훈의 얼굴이 더욱 심하게 일그러졌다.
역시 지난 생처럼 윤소민의 말이라면 그는 무조건 믿었다. 갑자기 마음 깊은 곳에서 피로감이 밀려왔다.
“헛소리 아니에요.”
나는 성주희의 손을 뿌리치고 주서훈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주서훈, 지난 한 달 동안 내가 널 쫓아다녔는지 네가 잘 알 거 아니야. 지난번에 성적표 앞에서 큰소리치진 않았다고 했잖아. 그런데 지금 소민이가 내가 커닝했다고 하니까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주씨 가문의 후계자이자 연회의 중심인물인 주서훈에게 쏠렸다.
주서훈은 몇 초간 침묵하다가 나의 옆에 서 있는 임효재를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천천히 시선을 거두었다.
“소민아, 내가 모의고사 시험지를 봤는데 은솔이의 문제 풀이 방식이 아주 명확했어. 커닝으로 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어.”
주서훈이 나를 두둔할 것이라 예상치 못했는지 윤소민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따져 물으려 했으나 그저 입술을 꽉 깨물고 애써 웃어 보였다.
“서훈아, 내가 잘못했어. 얕잡아봐서는 안 됐었는데.”
분명 사과의 말이었지만 윤소민의 시선은 줄곧 주서훈에게만 향했다. 그리고 그녀가 모욕한 사람이 주서훈인 것처럼 내 얘기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윤소민, 은솔이한테 사과해야지.”
임효재가 갑자기 나서자 윤소민은 가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선배, 정말 미안해...”
“혹시 해외에서 왔어?”
임효재가 그녀의 말을 끊더니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윤소민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 걸 본 임효재는 비로소 깨달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닌데 왜 그러지? 혹시 모국어가 조금 불편해? 아니면 모국어를 할 줄 몰라? 네가 사과해야 할 상대는 너한테 모욕당한 은솔이라고.”
윤소민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얼굴로 주서훈을 보면서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이번에 주서훈의 시선은 그녀에게 향하지 않았다.
윤소민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결국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안.”
두 글자를 내뱉자마자 몸을 돌려 뛰쳐나갔다.
주서훈은 웬일로 윤소민을 쫓지 않고 나에게로 다가왔다. 내가 흠칫 놀란 그때 손에 따뜻한 물 한 컵이 쥐어졌다.
“신경 쓰지 마. 결백한 사람은 굳이 해명하지 않아도 돼.”
임효재의 목소리가 한없이 부드러웠고 걱정도 조금 담겨 있었다.
“알아. 그러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 편을 들어줘서 고마워.”
주서훈이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시선이 내가 들고 있는 물컵에 머물렀다가 임효재에게로 향했다. 그러고는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선배는 서울대 입시 정책에 대해 잘 아나 봐?”
“어느 정도는 알지. 서울대생이니까.”
임효재가 예의 바르게 웃으며 답했다.
“은솔이는 목표가 뚜렷해서 잠재력이 있어. 내가 아는 선에서 몇 가지 궁금증을 풀어주었을 뿐이야.”
주서훈의 미간이 다시 일그러졌다. 나를 쳐다보면서 웬일로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물리 과목은 아직 보완할 부분이 있어. 수능 준비에 도움이 될 만한 경시대회 문제가 몇 개 있는데 내일 가져다줄게.”
“필요 없어.”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효재 선배가 이미 많은 학습 자료를 추천해줬고 당분간 그걸로 충분해. 그리고 우리는 거리를 두는 게 좋겠어. 남들이 괜히 오해할 수 있잖아.”
주서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뭔가 할 말이 있는지 입을 뻐금거렸다.
더는 그와 함께 있고 싶지 않았던 나는 자연스럽게 임효재의 팔짱을 꼈다.
“선배, 나 머리가 좀 어지러운데 바람 쐬러 같이 가줄 수 있어?”
같은 이유였지만 상대는 달랐다.
임효재는 즉시 상황을 파악하고는 매너 있게 내 팔을 부축했다.
“그럼 뒤쪽 정원 갈까? 거기 밤에 조명이 참 예쁘거든.”
말하면서 재킷까지 벗어 나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바람이 차. 감기 조심해.”
나는 고맙다는 눈빛을 보낸 후 주서훈을 뒤로한 채 정원으로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