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바람대로
“선배, 도와줘서 고마워. 그리고 곤란하게 한 것도 정말 미안해.”
주서훈이 따라오지 않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옆에 선 임효재를 돌아봤다.
“힘든 일도 아닌데, 뭐.”
임효재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은솔아, 아까 안에서 했던 말 진심이었어. 정말 너한테 엄청난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해. 분명히 꿈을 이룰 수 있을 거야. 난 널 믿어.”
임효재가 다정하면서도 단호한 말투로 다시 말한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회귀한 지 꽤 됐는데 이런 말을 처음 들었다. 나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임효재를 쳐다봤다.
“우리 연락처 교환하자. 혹시 나중에 모르는 문제가 생기면 편하게 연락해.”
나는 흔쾌히 동의했고 휴대폰을 꺼내 임효재의 카톡을 추가했다.
정원으로 가던 길에 한 남학생과 마주쳤다. 그 남학생은 임효재를 보자마자 눈을 번뜩이더니 다가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너 이 자식 여기서 뭐 해? 어디 숨어버린 줄 알고 계속 찾아다녔잖아. 따라와. 급히 할 얘기가 있어.”
남학생은 흥분한 얼굴로 임효재를 잡아당기면서 나를 힐끗 보고는 눈을 깜빡였다.
“미안한데 효재 좀 빌려 갈게요. 급한 일이라서요.”
“그러세요.”
임효재는 그대로 끌려가지 않고 남학생을 제지한 다음 미안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혼자 괜찮겠어? 원래는 같이 산책하기로 했는데. 미안해.”
별로 개의치 않았던 나는 손을 내저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괜찮아. 혼자 산책할 수 있으니까 먼저 가봐. 아까 일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서 혼자 있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나는 이리저리 둘러보며 정원을 거닐었다. 꽃도 보고 분수도 다 봤지만 연회장으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성주희가 나를 찾고 있는 것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계속 숨고 싶었다.
이곳에 있으면 지난 생의 일들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갔던 길도 또 갈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어떤 일은 피해갈 수 없나 보다. 속으로 생각하고 모퉁이를 돌자마자 주서훈이 어디선가 유령처럼 나타나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저 자식 대체 왜 저러는 거야?’
깜짝 놀란 나는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그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지나가려 했다. 주서훈과 가까이할 때마다 좋은 일이 없었기에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그런데 내가 주서훈의 옆을 지나가던 그때 몸이 뭔가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주서훈이 내가 걸치고 있던 재킷을 가져간 것이었다.
“주서훈, 머리가 어떻게 됐어? 옷은 왜 뺏어 가는데?”
나는 그를 째려보려다가 참았다. 저녁 날씨가 꽤 쌀쌀해서 바람이 분 순간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아무튼 참 이상한 애야. 설마 이제 와서 윤소민의 편을 들려는 건 아니겠지?’
“내 거 입어.”
주서훈의 눈에 분노가 스쳤다. 무의식적으로 옷을 벗으려다가 그제야 옷이 없다는 걸 알아챘다.
“네 옷 윤소민한테 걸쳐져 있던데?”
나는 그의 의도를 간파하고 순간 놀랐지만 이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혐오감으로 가득 찼다.
조금 전 윤소민과 다툴 때부터 윤소민은 그의 양복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지난 생이었다면 분명 질투했을 테지만 지금은 아무렇지 않았다.
나는 임효재의 옷을 다시 빼앗아 품에 안았다.
“다른 볼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주서훈은 순간 멈칫했다. 내가 이렇게 나올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송은솔, 몇 달 동안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어.”
주서훈이 나의 앞을 막아섰다. 두 눈에 의문과 짜증이 가득했다.
나는 제자리에 멈춰 서서 침착하게 그의 질문에 답했다.
“주서훈, 너랑 윤소민 참 이상해. 예전에 내가 너한테 매달릴 때는 계속 조롱하고 비아냥거리더니 매달리지 않으니까 한 사람은 자꾸 쓸데없는 트집을 잡고 한 사람은...”
나는 말을 채 하지 않고 도발적인 시선으로 주서훈을 아래위로 훑어봤다.
“소민이는 그런 뜻이 아닐 거야...”
주서훈은 무의식적으로 윤소민을 변호하려다가 갑자기 말을 바꿨다.
“나도 그 뜻이 아니야. 예전에는...”
“주서훈, 내가 너한테 매달리지 않기를 바랐던 거 아니었어? 지금 와서 이러는 건 무슨 뜻인데?”
그는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나의 말이 정곡을 찌른 바람에 반박하지 못하고 그냥 째려보기만 했다.
더는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나는 옷을 껴안고 떠나려 했다. 그런데 고개를 숙여보니 조금 전 실랑이를 벌이다가 임효재의 재킷이 화단에 쓸려 얼룩이 져 있었다.
세탁소에 맡기거나 새로 사줘야 할 판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주서훈을 쳐다보는 눈빛이 더욱 싸늘해졌다.
‘역시 이 자식을 만나면 좋은 일이 없어. 이젠 돈까지 깨지게 생겼잖아.’
“가지 마!”
내가 떠나려 하자 주서훈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일단 나를 덥석 잡았다.
나는 불쾌한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
“주서훈, 할 말이 있으면 한 번에 해. 여기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나 아주 바빠.”
주서훈은 입만 뻐금거릴 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공부하다가 어려운 거 있으면 내가 도와줄게. 굳이 다른 사람 찾아가지 말고. 우리가 더 가깝잖아.”
“그건 사양할게. 내가 너한테 꼬리 쳤다는 욕을 더는 먹고 싶지 않거든.”
나는 비아냥거리면서 말문이 막혀버린 주서훈의 얼굴을 쳐다봤다. 속이 다 시원했다.
“은솔아, 무슨 일 있어?”
주서훈이 입을 열기 전에 임효재가 다가왔다. 내가 곤란해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도와주러 온 것이었다.
주서훈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임효재를 돌아봤다.
임효재는 그의 시선을 무시하고 그의 옷에 시선을 두었다.
“은솔아, 바람이 찬데 왜 옷을 벗었어?”
갑자기 민망함이 밀려왔다. 멀쩡했던 옷이 몇 분 만에 더러워졌으니 말이다.
“미안해, 선배. 옷이 더러워졌어. 내가 가져가서 세탁소에 맡기거나 아니면 새 옷으로 사줄게.”
“난 또 무슨 큰일이라고.”
임효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옷을 받아 들었다.
“괜찮아. 정 미안하다면 다음에 내가 옷 사러 갈 때 은솔이 네가 골라줘.”
“그 정도야 당연히 가능하지. 주말에 언제든지 연락해.”
원래는 수능이 끝난 후에 가자고 말하고 싶었으나 상대방이 이렇게까지 물러섰는데 더 요구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주서훈은 내가 임효재하고만 얘기하는 걸 보더니 심기가 불편해진 듯했다.
“송은솔, 내가 지금 좋게좋게 얘기하는 게 안 보여? 내 인내심 시험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