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서예은이 핸드폰을 확인하자, 서지안에게서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대화창을 열자, 사진 한 장이 도착해 있었는데 찢어진 액막이 부적이 찍혀 있었다.
화면을 응시하던 서예은의 이마에는 주름이 깊어졌다.
이 부적은 서예은이 2년 전 영산사에서 직접 구해 온 것이었다.
당시 그녀는 과거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전설에 따라 999개의 계단을 올라간 뒤 108배를 올려 그 부적을 받아왔었다.
산바람이 매섭게 불던 그날,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힘들었지만 사랑하는 이의 건강과 행복을 위한 부적이었던지라 마음만은 달콤했다.
주현진은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는 감동하여 그녀를 안고 빙빙 돌리며 말했다.
“예은아, 이 세상에 나보다 더 행복한 남자는 없을 거야.”
하지만 오늘, 그 부적은 쓰레기 종이처럼 너덜너덜하게 찢겨 있었다.
마치 그들의 사랑처럼 산산조각 난 모습이었다.
지금 와서 보니 그저 웃음거리일 뿐이었다.
곧이어 서지안의 도발적인 문자가 도착했다.
[언니, 미안해. 현진 오빠가 액막이 부적이라면서 나한테 준 건데 눈에 익지? 언니가 고생해서 구해 온 거라며? 그런데 내 실수로 찢어졌어. 괜찮지? 내가 너무 미안해하니까 현진 오빠가 별거 아닌 부적이니 너무 마음 쓰지 말라던데.]
서지안은 서예은이 마음 아파할 거로 생각하며 흐뭇해했다.
서예은은 부적 사진을 한동안 바라보다 답장을 보냈다.
[맞아. 진짜 별거 아니야. 당근에서 천 원에 한 장을 팔길래 샀던 건데 네가 좋아하면 한 박스 보내줄까? 그런데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한테 부적은 아무 쓸모도 없대.]
문자를 본 서지안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서예은, 감히 날 비꼬는 거야? 기다려 봐. 곧 네 인생을 지옥으로 만들어줄 테니까.’
서지안은 서예은이 지금 고아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사귀었던 약혼자까지 자신한테 빼앗겼으니 곧 살아갈 의욕도 잃을 거라 예상하며 흐뭇해했다.
하지만 서지안의 예상과 달리 서예은은 오히려 새로운 결혼 생활이 기대될 뿐이었다.
손가락에 끼여진 반지를 보자, 서예은은 문득 박시우가 지금은 뭐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녀는 상대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결혼까지 한 자신이 너무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후회되지는 않았다.
여기까지 생각한 서예은은 무의식적으로 박시우의 카톡 프로필을 눌러봤다.
그의 프로필 사진은 라테 아트 커피 사진이었는데 꽃 모양은 따뜻하고 귀여운 디자인이었다.
왠지 박시우의 차가운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프로필 사진이였다.
‘박시우가 라테 아트를 좋아하나?’
서예은은 이 커피를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박시우의 문자가 도착했다.
[자?]
서예은은 급히 답장했다.
[이제 자려고요.]
[그래. 그런데 우리 부모님이 널 보고 싶어 하셔.]
폭탄 같은 그의 문자에 서예은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문자를 보냈다.
[알겠어요. 시간을 마련해 주세요.]
박시우는 그녀의 답변이 만족스러운 듯했다.
[그래. 일찍 자. 잘자.]
[네. 잘 자요.]
채팅창을 닫아도 심장이 멈추지 않자, 서예은은 자신이 너무 못나 보였다.
‘집안 어른들 때문에 결혼 하기로 한 사이에 무슨...’
이튿날 점심.
장은주는 서예은과 함께 라원에서 점심을 먹기로 약속했다. 그녀는 서예은이 충격에서 헤여나오지 못할까 봐 걱정스러웠다.
라원은 번화가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이었는데 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넓은 정원은 번잡한 도심 속에서도 고요한 분위기를 풍겼다.
식사 중 화장실에 들어간 서예은은 거울 앞에서 화장을 고치고 있는 서지안을 마주쳤다.
발렌티노 원피스를 입고 청순한 메이크업을 한 그녀는 거울 속 시선으로 서예은을 확인하더니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을 걸었다.
“어머, 언니. 어떻게 여기서 만나?”
이런 곳에서 서지안을 만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서예은은 악연이 이런 건가 싶었다.
서지안은 그림자처럼 항상 그녀의 눈앞에 나타나 알짱거렸다.
서예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서지안은 도발이라도 하는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현진 오빠랑 왔는데 지금 VIP룸에 있어. 같이 들어가서 먹을래?”
서예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아니. 구역질 나서 못 먹을 것 같아.”
“언니, 아직도 화났어? 미안해. 사실 오빠랑 나는...”
서지안은 일부러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서예은은 위선적인 그녀의 연기를 두고 볼 수가 없어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너한테 화날 게 뭐가 있어? 주현진 같은 쓰레기를 네가 주워가서 나야 오히려 고맙지. 이제 우린 끝났으니까 너희끼리 딱 붙어서 오래오래 잘 살아.”
“언니, 나도 언니가 현진 오빠를 아주 좋아한단 걸 알아. 하지만 사랑에 선착순이 어디 있겠어. 언니 엄마는 생전에 이런 것도 안 가르쳐 줬어?”
서지안은 서예은이 주현진과 절대 못 헤어질 거로 생각하고 그녀를 계속 자극했다.
자신의 엄마까지 들먹이는 서지은 때문에 화가 치밀어 오른 서예은은 순간 이성의 끈을 잃고 서지안의 뺨을 후려갈겼다.
“남의 약혼자를 빼앗아 놓고 당당하게 자랑질이야? 너 같은 건 맞아도 싸. 혹시 너도 네 엄마처럼 내연녀로 사는 게 취미야? 이 세상에 남자가 다 죽었어? 왜 하필 다른 여자의 남자만 넘보려 들어? 멍청하다 못해 한심한 년.”
“서예은! 너...”
서지안은 자신의 얼굴을 감싸고 소리를 질렀다. 방금까지의 여유롭던 미소는 사라지고,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더 이상 입씨름하기 싫었던 서예은이 뒤돌아서 나가려는 찰나, 서지안이 갑자기 그녀의 팔을 움켜쥐더니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언니, 미안해. 진짜 오해야. 현진 오빠랑 나는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제발 화 풀어줘.”
갑작스러운 서지안의 태도 변화에 서예은은 어리둥절해하며 그녀를 바라봤다.
‘뭐지? 귀신이라도 쓰인 건가?’
방금까지도 승리의 미소를 지어 보이던 서지안은 순간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서예은은 잡혀있는 팔에 통증이 전해지자, 참지 못하고 서지안의 손을 뿌리쳤다.
기다리기라도 한 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소리까지 지르는 서지안의 모습에 서예은은 다시 한번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인형이야? 뭐 이렇게 쉽게 넘어져?’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던 서예은은 급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한 남자를 보고 차갑게 웃음을 지었다.
‘이유가 이거였어? 자작극이었네.’
서예은은 연기자 뺨치는 서지안의 연기력에 다시 한번 탄복했다.
“서예은, 지금 서지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주현진의 차가운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