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임미진은 맥이 풀린 듯 바닥에 주저앉아 중얼거렸다.
“가난도 괜찮고, 고생도 괜찮은데... 정말 더 이상 방법이 없어.”
하지안은 그녀의 태도가 누그러진 것을 느끼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때 차건우가 시야에 들어오자 하지안은 마치 구세주라도 본 듯 그를 향해 외쳤다.
“차 대표님, 임미진 씨는 차현 그룹에서 5년이나 성실히 근무해 왔습니다. 큰 잘못도 없이 이렇게 해고되면 안 됩니다!”
차건우는 냉정하게 응수했다.
“해고는 상사의 권한이야.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한 거지. 사람마다 해고 통보받았다고 투신 소동 벌이면 회사가 유지되겠어?”
하지안은 멍해졌다.
차건우가 얼마나 냉정하고 이성적인 사람인지 알고 있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너무 잔인했다.
그의 말 한마디에 그녀의 가슴은 싸늘하게 식었다.
‘부자들에게 다른 사람의 생명은 정말 이토록 가벼운 건가?’
“대표님, 저한테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하셨죠. 좋아요, 내일 회의실에서 정식으로 반성문을 읽고 사과할게요. 그러니까 아주머니만은 다시 복직시켜 주세요.”
하지안은 고개를 숙인 채 조심스레 말했다.
창백한 얼굴에 애절한 눈빛이 담겨 있었다.
차건우의 시선이 묘하게 흔들렸다.
짧은 침묵 끝에 그는 얇은 입술을 움직이며 말했다.
“내일 보지.”
하지안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녀는 차오르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돌아서서 말했다.
“아주머니, 어서 이쪽으로 오세요. 대표님께서 복직 허락하셨어요. 우리 이제 내려가요.”
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고 온화한 목소리에 차건우는 무심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두어 번 더 바라보았다.
임미진의 분노와 원망도 눈 녹듯 사라졌다.
그녀가 벌떡 일어나려는 순간 비에 젖은 바닥이 미끄러워 그대로 뒤로 고꾸라졌다.
모두가 깜짝 놀라 굳어버렸다.
가장 가까이 있던 하지안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손을 뻗어 임미진을 붙잡았다.
하지만 하지안의 체구는 너무 가녀려 끌어당기려다 오히려 자신까지 휘청 앞으로 쏠려버렸다.
수십 층 위에서 벌어진 소동이었다 보니 떨어지면 죽은 목숨이었다.
하지안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숨 막히는 아찔한 순간, 누군가 하지안의 팔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차건우가 위에서 내려다보며 온 힘을 다해 그녀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차건우가 구해줄 줄은 몰랐던 하지안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민아는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천한 년... 조금만 있으면 죽는 꼴 볼 수 있었는데... 젠장!’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달려왔고 결국 두 사람은 무사히 끌어올려졌다.
간신히 안전지대에 돌아온 하지안은 바닥에 주저앉아 온몸을 떨었다.
그제야 엄습해 오는 두려움에 숨이 가빠졌다.
차건우는 젖은 얼굴로 자기 발치에 주저앉아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일어나.”
”다리가 풀려서... 못 일어나겠어요.”
차건우의 눈빛이 매섭게 좁혀졌다.
그 시선을 감당 못 한 하지안이 이를 악물고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금세 다리가 꺾이며 또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순간 차건우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정말 한심하네.”
하지안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하민아조차 믿을 수 없다는 듯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치밀어 오르는 질투와 분노에 이를 악물며 하지안을 향해 살기를 띤 눈길을 보냈다.
정신을 차린 하지안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몸을 버둥거렸다.
“내려주세요! 저 혼자 걸을 수 있어요!”
하민아도 이를 악문 채 끼어들었다.
“건우 씨, 제가 언니를 부축할게요. 옷도 다 젖었잖아요. 그러다 감기 걸려요.”
그러나 차건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업무 시간에 그렇게 한가한가?”
하민아는 말문이 막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는 차건우의 태도가 전과 다름을 눈치채고 혹시나 차건우의 심기를 어지럽힐까 봐 결국 억지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럼 일하러 먼저 가볼게요.”
말을 마친 하민아는 하지안을 노려보고 나서야 마지못해 발걸음을 옮겼다.
...
하지안은 자신이 휴게실에 버려질 줄 알았지만 뜻밖에도 차건우는 그녀를 데리고 차씨 가문 저택으로 돌아갔다.
저녁 식사를 하고 있던 차준혁은 두 사람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퇴근했어? 어서 와서 저녁 먹자.”
집사가 재빠르게 식기와 밥그릇을 놓았다.
“지안아, 오늘 첫 출근이었지? 어땠어?”
하지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너무 좋았어요.”
“건우는? 또 너 괴롭히지는 않았고?”
그 말에 차건우가 날카롭게 그녀를 쏘아보았다.
하지안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대표님은 저한테 잘해주셨어요. 회사 끝나고 차도 태워주셨고요.”
차건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아무 말 없이 식사를 계속했다.
차건우는 그 반응에 만족한 듯 보였지만 차준혁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결혼까지 했는데 아직도 대표님이 뭐야?”
하지안은 입술을 깨물며 용기 내어 입을 열었다.
“건우 씨...”
차건우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안은 그의 눈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고 창피한 듯 그저 죽만 바라보았다.
차준혁은 그녀가 수줍어하는 줄 알고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래. 앞으로도 그렇게 부르렴.”
저녁 식사를 마친 후, 하지안은 방으로 돌아와 뜨거운 물로 샤워했다.
샤워를 마치고 욕실을 나선 그녀는 바로 차건우를 마주쳤다.
하지안은 잠옷 차림이었고 막 씻은 탓에 얼굴은 희고 투명하게 붉게 물들어 있었고 젖은 머리는 마치 사슴처럼 그녀를 순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차건우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목울대를 삼켰다.
은은한 귤 향기가 풍겼다. 어디서 맡아본 듯한 익숙한 향기였다.
하지안은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가슴도 허리도 드러나지 않았고 다리만 일부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시선에 불편함을 느낀 하지안은 옷자락을 아래로 끌어내리며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말했다.
“오늘 옥상에서 도와줘서 고마워요.”
잠시 멍해진 자신을 깨닫고 차건우는 눈빛을 차갑게 바꾸며 말했다.
“그런 아부할 시간 있으면 반성문이나 쓰지.”
그렇게 말하고는 욕실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하지안의 가슴속에 있던 감사함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녀는 조용히 종이와 펜을 꺼내어 소파에 앉았다.
몇 번이고 고쳐 쓰다 겨우 두 줄을 썼을 무렵 머리가 어지럽고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정신을 붙들려 애썼지만 하지안은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훤히 떠 있었다.
기침을 두 번 하자 머리는 더 어지럽고 목은 바싹 말라 아팠다.
어제 비를 많이 맞은 탓에 감기에 제대로 걸린 듯했다.
하지안은 몸이 무거워 움직일 수도 없었지만 회사를 생각하며 억지로 눈을 떴다.
핸드폰을 집어 들고 시간을 확인한 하지안은 그대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얼굴도 씻지 못한 채 택시를 잡아타고 회사로 향했다.
아침 일찍 출근한 하민아는 곧장 차건우에게 다가갔다.
“건우 씨, 혹시 화났어요?”
“왜?”
“어제 저한테 너무 차가웠잖아요. 저 사실 그렇게 도도하지도 않고 막무가내인 성격도 아니에요. 하지만 언니가 자꾸 저한테 자기야말로 차씨 가문의 사모님이라고... 건우 씨의 법적 와이프라고 자랑하잖아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감정이 폭발했을 뿐이에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화 풀어주세요. 네? 저 어젯밤에 한숨도 못 잤단 말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내 여자인데... 이 정도 실수는 봐줄 수 있지.’
차건우가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너랑 결혼하겠다고 한 이상 약속은 지킬 거야. 누가 뭐래도 변함없으니까 다음부턴 머리를 좀 써. 누가 뭐라 한다고 그렇게 휘둘리지 말고.”
“네!”
하민아는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회의실로 가자.”
전날 회의 공지가 떨어진 터라 회사의 모든 고위 임원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차건우는 커피를 홀짝이며 다리를 우아하게 꼰 채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하민아가 잔뜩 기대를 품은 채 앉아 있었다.
그녀는 하지안이 개처럼 무릎 꿇고 자신에게 사과하는 모습을 너무나 보고 싶었다.
하지만 8시가 되어도 하지안은 나타나지 않았다.
10분이 더 지나도록 그녀는 오지 않았고 차건우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하민아 또한 당황한 듯 얼굴이 굳었다.
“건우 씨, 혹시 언니가 약속을 어긴 거 아닐까요?”
“전화해 봐.”
차건우의 호통에 고민석이 바로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만 갈 뿐 연결되지 않았다.
고민석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표님, 전원이 꺼져 있어 연결이 안 됩니다.”
차건우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나를 속이는 것도 모자라 기만까지 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