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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회의가 끝나고 모두가 회의실을 나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쾅 소리가 나며 문이 밖에서 벌컥 열렸다. 차건우는 냉랭한 얼굴로 그쪽을 매섭게 바라봤고 다른 사람들도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헝클어진 머리에 창백한 얼굴을 한 하지안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늦었습니다.” “허, 늦었군.” 차건우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냉정하게 덧붙였다. “어제 했던 약속은 무효다. 그 뛰어내리려던 청소부랑 같이 꺼져.”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하지안이 변명하려 했지만 차건우는 짜증스럽게 말을 끊었다. “나가!” 하지안은 고집스러운 얼굴로 버티며 물러서지 않았다. 비록 몸이 축 늘어지고 전신이 아파서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지만 그녀는 마지막 남은 기운으로 버티고 있었다. “기회를 줬는데도 제대로 못 잡은 건 너야. 난 그 누구에게도 같은 기회를 주지 않아. 질척대봤자 소용없어.” 그 순간 하지안은 깊이 후회하며 자신을 탓했다. 그녀가 움직이지 않자 차건우는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 “끌어내.” 고민석은 잠시 망설이다가 명령을 따르며 하지안의 팔을 잡고 끌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지안 씨.” 하지안은 절망 속에서 식은땀을 흘렸다. 그때 하민아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안의 머릿속에 갑작스레 한 가지 생각이 번쩍였다. “잠시만요!” 차건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안은 기침하며 말했다. “제가 사과할 대상은 하민아 씨입니다. 두 여자 사이의 다툼을 대표님께서 직접 처리하시는 건 부적절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러니까 이 문제는 하민아 씨가 결정하는 게 맞다고 봅니다. 하민아 씨가 제 사과를 원하신다면 기꺼이 하겠습니다. 하지만 하민아 씨가 제 무릎 꿇은 사과를 원하지 않는다면 회사에 매달리지 않고 바로 떠나겠습니다.” 차건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정말 교활한 여자군.’ 하지안은 그의 시선에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고 숨을 깊이 들이켰다. 그녀는 지금 도박을 하고 있었다. 하민아가 공개적으로 망신 줄 기회를 놓칠 리 없으니 자신을 이렇게 쉽게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판단에서 건 도박이었다. 차건우는 하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갑작스러운 질문에 하민아는 순간 얼어붙었다. “저... 저는...” “네 일이잖아. 스스로 결정해.” 하민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곧 미소를 지었다. ‘하지안을 회사에서 내쫓으면 오히려 좋은 기회를 놓치는 꼴이잖아? 그럴 거면 무릎 꿇게 해서 망신을 주는 게 훨씬 짜릿하겠어. 앞으로도 종종 눈앞에서 조롱할 수 있고...’ “건우 씨, 언니가 회사에 남고 싶다니 그냥 사과하게 하죠. 그렇게까지 언니를 쫓아낼 마음은 없어요.” 도박에서 이긴 하지안은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차건우는 의자에 기대며 비웃듯 말했다. “뭘 멍하니 있어?” 하민아는 의기양양하게 자세를 고쳐 앉으며 핸드폰을 꺼내 촬영 준비를 했다. “좋아요.” 하지안은 기운 없는 몸을 이끌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무릎 꿇고 사과하면 되는 거잖아. 그냥 개한테 물렸다고 생각하자.’ 그러나 단상에 도달하기도 전에 심한 어지러움이 몰려오며 눈앞이 까맣게 변했고 결국에는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모두가 충격에 빠졌다. 차건우는 찌푸린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가 다리를 발로 건드렸다. “일어나.” 하지안은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제야 차건우는 그녀의 이마에 손을 올렸고 화끈하게 달아오른 열기에 얼굴을 굳혔다. 그는 주저 없이 고민석에게 그녀를 넘기고는 자리를 뜨려 했지만 문득 옥상에서 그녀가 임미진을 구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두려워하면서도 물러서지 않았지.’ 차건우는 걸음을 멈췄고 곧 회의실로 되돌아와 하지안을 안아 올렸다. 하민아의 얼굴이 질투로 일그러졌다. “건우 씨, 내려놔요.” 차건우가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지금은 명목상 아내야. 회사에서 죽게 둘 순 없어.” “일부러 아픈 척하는 거예요!” 하민아는 즉각 모함을 내뱉었다. “연기인지 아닌지는 병원에 가면 알겠지. 고민석, 차 준비해.” “네.” 지금 상황이 불만스러웠던 하민아는 뭐라 하고 싶었지만 차건우가 이미 발걸음을 옮기고 있어 얼른 뒤따라가며 말했다. “건우 씨, 같이 가요.” 차건우는 반대하지 않았고 차는 이내 병원에 도착했다. 고민석이 문을 열고 하지안을 부축하려 하자 차건우가 냉정하게 말했다. “됐어. 내가 할게.” 고민석은 재빨리 몸을 피했다. 의사는 이미 진료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하지안의 증상을 살핀 뒤 말했다. “코막힘, 콧물, 기침 증상이 있어 감기로 인한 호흡기 감염으로 보입니다. 정확한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혈액검사를 해야 하고 우선 따뜻한 물을 마시게 해 주세요.” 혈액 검사가 끝난 후 의사는 몇 마디 주의 사항을 덧붙이고 자리를 떴다. 차건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물컵을 들고 병상에 누워 있는 하지안에게 다가갔다. 하지안은 아직 깨어나지 못했지만 얼굴은 점점 더 붉어져 마치 불에 달군 듯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를 돌보는 걸 견딜 수 없었던 하민아가 먼저 나섰다. “건우 씨, 제가 할게요.” “그래.” 하민아가 물컵을 들고 하지안의 입에 가져갔지만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한참을 애써봤지만 전혀 마시지 못했고 오히려 옷만 흠뻑 젖게 했다. 하민아는 이를 악물고 몰래 하지안의 팔을 세게 꼬집었다. 하지안이 잦은 기침을 하기 시작하자 차건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줘 봐.” 하민아는 마지못해 컵을 건넸다. 차건우는 보기 드물게 인내심을 보이며 하지안의 턱을 살짝 잡고 물을 조심스럽게 먹였다. 예상보다 쉽게 물을 넘기는 그녀를 보며 그는 약간 놀란 듯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래도 고분고분하네.’ 차건우가 물컵을 내려놓고 자리를 뜨려 했으나 하지안이 그를 끌어안았다. 하민아는 그 장면에 속이 뒤집힐 듯 분노가 치밀었다. ‘이 뻔뻔한 계집애가!’ 열에 들뜬 하지안이 중얼거렸다. “엄마, 가지 마...” 차건우는 얼굴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정신 차리고 내가 누군지 잘 봐.” “소리 지르지 마. 머리 아파서 힘들어...” 하지안은 그의 허리에 얼굴을 파묻으며 몸을 비볐다. 뜨거운 숨결이 셔츠를 뚫고 가슴을 타고 흘렀다. 차건우는 목울대를 꿀꺽 삼키며 몸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결국 참지 못한 하민아가 뛰쳐나와 하지안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억지로 떼어냈다. “건우 씨, 제가 돌볼게요.” “그래.” 차건우는 무심하게 대답하며 넥타이를 풀고 병실을 나섰다. 그는 담배를 입에 물며 속에서 치솟는 욕망을 억눌렀다. 한편, 병상 위의 하지안을 바라보던 하민아는 분노로 치를 떨었다. ‘내 눈앞에서 건우 씨를 유혹하다니... 죽일 년!’ 그녀는 분이 풀리지 않아 하지안의 팔을 다시 한번 세게 꼬집었다. 하지안의 속눈썹이 살짝 떨리며 깨어날 조짐을 보였지만 하민아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다시 한번 힘을 주려던 찰나 의사가 병실로 들어와 하민아는 아쉽게도 손을 내렸다. “독감입니다. 수액을 맞으셔야 해요.” 하민아는 무심하게 답했다. “그래요.” ‘그냥 타죽어 버렸으면...’ 의사가 말을 이었다. “다만 환자가 임신 중입니다. 일부 산모들은 아기 건강을 걱정해 약만 먹고 수액을 피하려 하지만 사실 조심해서 선택하면 수액도 가능합니다. 그래서 환자나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하민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뭐라고요? 임신했다고요? 그럴 리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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