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의사는 검사 결과지를 내밀며 설명했다.
“이건 혈액 검사 결과입니다. 일반적으로 호르몬 수치가 25U/L 이상이면 임신으로 간주하는데 환자의 호르몬 수치는 36U/L입니다.”
그 말을 들은 하민아는 얼굴이 일그러질 정도로 화가 났다.
그녀는 하지안의 몸이 이렇게나 유능할 줄은 몰랐다.
‘고작 하룻밤 만에 임신이라니...’
마침 눈을 뜬 하지안은 의사의 말을 전부 듣고 있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내가 임신했다고?’
의사가 말을 이었다.
“환자분 독감이 심해서 약을 먹으면 회복이 더딜 수 있고 태아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제 의견은 수액 치료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약으로 하죠.”
“수액 맞을게요.”
두 사람의 목소리가 동시에 나왔다.
하지안은 의사를 바라보며 힘없이 말했다.
“전 수액을 맞고 싶어요.”
“좋습니다. 그럼 처방하겠습니다.”
의사가 나가자 하민아는 비꼬듯 말했다.
“어머, 깼네? 설마 그 짐승 같은 애 낳을 생각은 아니겠지?”
하지안은 혼란스러웠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너랑 상관없어.”
“병든 엄마에 아버지는 누군지도 모르는 사생아. 거기다 넌 돈도 없는데 그 아이 키울 능력이나 돼?”
하민아가 비웃으며 말했다.
“지워버려. 애는 짐일 뿐이야. 그리고 차씨 가문에서 알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생각은 해봤어?”
하지안이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차건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슨 종이야?”
순간 하민아가 당황했다.
하지안의 얼굴도 굳어졌다.
순간 심장이 멎을 뻔한 하지안이 침착하게 말했다.
“별거 아니에요. 의사가 준 처방전이에요.”
하민아는 급히 정신을 차리고 검사 결과지를 가방에 쑤셔 넣었다.
‘절대 차건우가 알게 해선 안 돼! 만약 본인 애라는 걸 알게 되면 내가 하지안을 대신해 그 자리를 꿰찼다는 사실이 들통날 테고 그럼 차씨 가문 사모님의 자리도 위태로워질 거야.’
하지안은 차건우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며 무표정하게 물었다.
“여긴 왜 왔어요?”
차건우가 되물었다.
“왜 왔을 것 같아?”
하지안은 그를 힐끗 보더니 하민아를 바라봤다.
“일부러 하민아를 병원까지 데려와서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하려는 건가요?”
그녀는 하민아가 자신을 병원에 데려왔을 리 없다고 확신했고 차건우 역시 그런 마음씨 좋은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차건우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이게 무슨 태도지?’
하지안은 온통 임신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고 차건우와 말싸움할 정신도 없었다.
그녀는 의욕 없는 얼굴로 자포자기한 듯 말했다.
“사과하고 퇴직할게요. 일은 필요 없으니까... 대신 임미진 씨만은 남겨주세요.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잖아요.”
차건우는 시선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제만 해도 맑고 청순했던 얼굴은 창백하고 생기라고는 전혀 없었다.
‘몸이 정말 약하네.’
차건우는 드물게도 자비를 베풀었다.
“이틀 휴가 줄게. 끝나면 회사로 복귀해.”
하지만 하지안은 여전히 임신 생각으로 가득 차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
그 결정이 불만스러웠던 하민아가 입을 열었다.
“건우 씨, 왜 또 출근하라는 거예요?”
“청소부 자리일 뿐인데 맡겨도 상관없잖아.”
그 말에 하민아도 이해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곧 덧붙였다.
“하지만 언니가 또 저를 괴롭힐 거예요.”
차건우는 단호하게 경고했다.
“다시는 하민아 건드리지 마.”
하지안은 무감각한 얼굴로 말했다.
“건드린 적 없어요. 먼저 시비 건 건 하민아예요.”
“하민아가 겉으로는 거칠고 오만한 척하지만 그 애는 네 상대가 안 돼. 넌 겉보기엔 순하고 착해 보이지만 속은 교활하고 꾀가 많아. 그리고 네가 하민아 자리를 빼앗았으니 그 정도는 참아야지.”
하지안은 씁쓸하게 웃었다.
“하...”
하민아는 의기양양하게 차건우의 팔에 기대며 말했다.
“건우 씨, 저 데려다주면 안 돼요?”
“그래.”
하민아는 다시 하지안을 향해 말했다.
“언니, 오늘 건우 씨 늦게 들어갈 거니까 기다리지 마.”
말을 마친 두 사람이 병실을 나섰지만 자신만의 생각에 잠긴 하지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의사가 수액 놓으러 왔을 때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임신한 지 얼마나 됐나요?”
“혈액 검사로는 임신 여부만 알 수 있습니다. 정확한 주 수는 초음파로 확인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수액을 다 맞은 뒤 하지안은 초음파 검사를 요청했다.
잠시 후 의사가 말했다.
“임신 4주입니다.”
가슴이 요동친 하지안은 말없이 침묵했다.
“원하지 않나요?”
“그게...”
하지안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사실 원하지 않는 아이인 건 맞았다.
하민아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지금의 그녀로서는 엄마조차 부양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아이까지 생긴다면 더 감당하지 힘들 것이었다.
게다가 차건우가 알게 된다면 무슨 일이 닥칠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의사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 말했다.
“원치 않으신다면 평소에 피임을 잘했어야죠.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환자분은 임신이 쉽지 않은 체질이에요. 이번에 아이를 지우면 다시 임신하기는 힘들 겁니다.”
그 말을 듣고 하지안은 주먹을 꼭 쥐며 망설였다.
의사는 조용히 권했다.
“보통 49일 이내에는 약물로도 유산할 수 있습니다.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충분히 고민해 보세요. 산모분이 예쁘시니 아기도 분명 예쁘게 태어날 거예요.”
병원을 나서는 하지안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남길까? 지울까? 남기자니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고... 지우자니 어쩌면 평생 다시 임신 못할 수도 있는데...’
복잡한 생각에 하지안은 두통이 심해졌다.
순간 이유 없이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진 그녀는 고유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한 시간 뒤쯤 도착할 것 같아.”
버스에서 내리자 익숙한 모습이 멀리서 눈에 띄었다.
하지안의 눈가가 붉어졌다.
집에 오는 날이면 고유정은 언제나 골목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안이 달려가 고유정의 품에 안겼다.
“엄마, 얼마나 기다린 거야?”
고유정이 웃으며 말했다.
“얼마 안 됐어. 뭘 이렇게 많이 샀어. 돈도 없으면서.”
입으로는 꾸짖었지만 손은 다정하게 물건들을 받아서 들었다.
“많이 산 것도 아니야. 우유, 달걀, 고기... 엄마 몸보신하라고 영양제도 조금 샀어.”
두 사람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비록 작고 낡은 집이지만 하지안은 이 집이 너무나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엄마, 오늘 밤 나랑 같이 자자.”
고유정은 채소를 다듬으며 말했다.
“그건 안 되지.”
“할아버지한테 미리 전화드렸어.”
고유정은 더 이상 말없이 식사 준비를 했다.
잠시 후 저녁이 완성됐다.
하지안은 갈비 한 점을 집어 먹었다가 갑자기 속이 뒤집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황급히 뛰어나가 토했다.
고유정이 다가와 다급히 물었다.
“왜 그래? 어디 아픈 거야?”
하지안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아니야. 그냥 감기 때문에 그래. 기름진 걸 먹었더니 속이 안 좋아서.”
“몸 잘 챙겨야지.”
“응...”
하지안은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엄마는 나 임신했을 때 어떤 기분이었어?”
고유정은 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놀랍고 무섭고 기쁘고... 참 복잡했지.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더라. 아이를 가진다는 건 행복한 일이지만 동시에 두렵기도 해. 잘 키울 수 있을까 하는 걱정... 하지만 배 속에서 아기가 움직일 때 느끼는 그 행복은 또 말로 다할 수 없지.”
하지안이 고유정을 꼭 껴안자 고유정이 묘한 표정으로 물었다.
“근데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 설마... 너 임신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