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결박된 하지안은 침대에 묶인 채로 있었다.
중년 남자는 장갑을 끼며 수술 준비를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하지안은 공포에 질려 그를 향해 간절히 호소했다.
“제발요... 제 아이를 다치게 하지 말아 주세요.”
중년 남자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쓸데없는 시간 낭비하지 마.”
하지안은 고개를 흔들며 거부했지만 중년 남자는 단호하게 손을 뻗었다.
차가운 기구가 몸속으로 들어오려는 그 순간 하지안이 다급히 소리쳤다.
“잠깐만요! 배가 너무 아파요. 화장실에 가고 싶어요.”
“귀찮게 굴긴...”
중년 남자는 짜증을 내며 결박을 풀고 바닥에 있는 대야를 가리켰다.
“거기다 해결해.”
“부탁이에요. 잠깐만 밖에 나가 계시면 안 될까요? 다 끝나면 부를게요.”
“빨리 해.”
그는 말을 툭 던지곤 문을 닫고 나갔다.
하지안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벽에 기대어 앉았다.
등에 식은땀이 흘렀고 드디어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숨을 고른 그녀는 방 안을 둘러보며 탈출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창문을 열어보니 놀랍게도 방범창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밖은 2층 높이였던 터라 하지안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
그때 하민아가 느지막이 도착했다.
서혜민은 그녀를 보자마자 꾸짖듯 말했다.
“회사에 있어야 할 애가 여긴 왜 왔어?”
하민아는 혐오에 찬 미소로 답했다.
“그년이 어떻게 되는지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요. 결과도 직접 보고 싶고요. 시술은 끝났어요?”
“아직. 배가 아프다면서 기다려 달라고 했대. 볼일 다 보면 다시 들어가기로 했어.”
하민아는 실망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다 3분 정도가 지나고 하민아가 참지 못하고 문을 걷어찼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안에서 죽은 거 아니에요?”
방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하민아는 왠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하지석과 서혜민도 눈빛을 교환하며 다가왔다.
도구를 이용해 문을 강제로 열자 방 안은 텅 비어 있었고 창문에는 하얀 침대보가 줄처럼 묶여 있었다.
하민아의 얼굴이 굳어졌고 하지석과 서혜민의 표정도 사색이 되었다.
“그년 안 그래도 잔머리 잘 쓴다고 했잖아요! 제대로 감시 좀 하지 그랬어요! 이게 뭐예요!”
하민아가 울분 섞인 목소리로 외치자 하지석이 차갑게 말했다.
“울긴 왜 울어! 어차피 멀리 가지도 못했을 텐데 빨리 가서 찾아.”
예상대로 도로 멀지 않은 곳에서 도망치는 하지안이 보였다.
하민아는 악에 받쳐 엑셀을 밟았다.
하지안은 죽을힘을 다해 달렸지만 사람이 차를 이길 수는 없었다.
결국 하지안은 길 앞을 막은 차량에 의해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하민아가 다가왔고 하지안은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뒤에선 하지석이 따라와 이미 도망갈 길은 없었다.
하민아는 다짜고짜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잘도 도망치네? 왜? 이제 못 뛰겠어?”
“뛰다 지쳤어. 좀 쉬면 안 돼?”
하지안이 냉소하며 답했다.
“건방지긴. 곧 고개도 못 들게 해줄게. 나한테 빌게 될 날이 올 거야.”
서혜민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같잖은 말싸움은 집어치우고 당장 병원으로 끌고 가!”
“그럴 필요 없어요. 너무 귀찮잖아요.”
하민아는 그녀의 배를 노려보며 악독하게 말했다.
“그냥 여기서 얘 걷어차면 되지 않아요?”
말을 마치자마자 하민아는 하지안의 배를 향해 강하게 발길질했고 하지안은 온 힘을 다해 그녀를 밀어냈다.
그 광경에 하지석과 서혜민이 그녀를 억지로 눕혔고 하민아는 그녀의 뺨을 내리치고는 계속해서 배를 걷어찼다.
하지안은 본능적으로 배를 감싸며 웅크렸다.
“그래도 사생아를 지키겠다고 애쓰네? 오늘 매운맛 좀 보여주지!”
하민아는 미친 듯 웃으며 발길질을 이어갔다.
하지안은 고통 속에서도 하지석을 바라보며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아버지, 제발 이번 한 번만 봐줘요. 애 낳고 나면 조용히 차씨 가문 떠나서 평생 다시 나타나지 않을게요. 네? 제발...”
마른 딸을 바라보던 하지석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서혜민이 그의 팔을 꼬집으며 속삭였다.
“저 계집애한테 마음 약해지면 우리 다 끝장이에요! 앞으로의 부귀영화만 생각하자고요.”
하지석이 이를 악물며 명령했다.
“계속해!”
그 순간 하지안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음까지 철저히 무너진 그녀는 눈을 감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가야... 미안해. 엄마가 무능력해서 널 못 지켰어. 미안해... 우린 인연이 아니었나 봐.’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하지안의 얼굴을 바라보며 하민아는 더욱 흥분해 발길질을 이어갔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때 싸늘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뭔 상관이야!”
하민아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소리쳤고 하지안은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익숙한 실루엣, 익숙한 목소리...
차건우였다.
하지안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떨구며 눈빛을 어둡게 가라앉혔다.
‘어차피 하민아를 아끼는 사람이니 나를 도와줄 리 없겠지.’
하지석과 서혜민도 멍하니 얼어붙은 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차건우는 하지안의 붓고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고는 곧바로 싸늘한 눈빛으로 하민아를 쏘아보았다.
하민아는 여전히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오만하게 소리쳤다.
“괜한 일에 끼어들지 말고 꺼저. 안 그러면 너도 무사하지 못할 줄 알아.”
차건우는 감정 하나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제법이네.”
“당연하지. 나는 차씨 가문 미래의 사모님인데! 건우 씨...”
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건우를 발견한 하민아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어떻게... 이런 시골구석에 차건우가 있을 수 있지?’
차건우는 싸늘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그... 그게...”
하민아는 온몸을 떨며 뒷말을 잇지 못했다.
차건우는 말없이 걸어가 바닥에 쓰러진 하지안을 번쩍 안아 들었다.
그가 자신을 도와줄 줄은 몰랐던 하지안은 놀란 나머지 멍해졌다.
하지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차건우의 옷자락을 꼭 붙잡았다.
그 광경을 본 하민아는 완전히 폭발했다.
그녀는 미친 듯이 달려가 차건우의 팔을 잡고 불쌍하고 억울한 표정을 한 채 외쳤다.
“건우 씨, 지금 보신 거 다 오해예요. 제 말 좀 들어봐요...”
하지만 차건우는 얼굴을 찌푸리며 거칠게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꺼져. 지금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하지안을 안은 채 차에 올라 떠나버렸다.
하민아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화장이 번져버려 엉망이었다.
한참 후 정신을 차린 하지석이 물었다.
“차 대표가 어떻게 여길 온 거지?”
하민아는 흐느끼며 말했다.
“오늘 외근 나간다고 해서 저도 휴가 내고 온 건데... 이런 곳에 시찰 올 줄은 누가 알았냐고요!”
서혜민은 이를 악물며 씹어 뱉듯 말했다.
“그 계집애... 정말 팔자도 좋아. 조금만 더 하면 완전히 끝장낼 수 있었는데...”
하민아는 분노와 두려움이 뒤섞여 마음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엄마, 건우 씨가 날 보고 싶지 않다고 꺼지라고 했어요. 정말 무서워요. 그 사람이 나 버리면 어떡해요?”
“걱정하지 마. 엄마한테 다 방법이 있어.”
서혜민의 눈동자에 음험한 기색이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