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차 안에서 차건우는 하지안을 노려보며 물었다.
“병 치료하라고 휴가 줬더니 이런 곳에 왜 온 거야?”
하지안은 잠시 얼어붙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뭐라 대답할지 고민했다.
‘낙태 때문에 끌려왔다고 할 수도 없고...’
“볼일이 있었어요.”
“무슨 볼일?”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에요. 왜 그렇게 남의 일에 관심이 많으시죠? 차 대표님.”
차건우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내가 분명히 하민아한테 시비 걸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은 거야?”
“명심하고 있어요. 단 한 순간도 잊은 적 없어요.”
하지안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대표님은 왜 제가 하민아한테 시비 걸었다고 단정하세요? 혹시 하민아 먼저 저를 건드렸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
“비꼬지 마.”
차건우가 냉소했다.
“네가 원래 하민아의 자리를 뺏은 거야. 그 대가는 치러야지.”
“알겠어요.”
하지안은 기운 없이 답했다.
방금까지 죽다 살아났고 온몸이 아프고 힘이 빠진 그녀는 더 이상 말싸움할 기력조차 없었다.
‘그냥 생각하는 대로 두자. 우리 아기는 괜찮을까?’
그녀는 시선을 떨구고 조심스럽게 배에 손을 얹었다.
차건우는 알 수 없는 분노가 가슴속에서 치밀었지만 그녀의 찢어진 입술을 보고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얼굴 이리로 돌려.”
하지안이 의아해하자 그는 참을성 없이 그녀의 얼굴을 억지로 돌리고 입술 상처에 소독약을 발랐다.
생각지도 못한 행동에 하지안은 놀랐지만 약이 상처에 닿자 밀려드는 통증에 저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앗...”
차건우는 그녀를 흘낏 보더니 턱을 움켜잡고 얼굴을 더 가까이 당겼다.
남자의 뜨거운 숨결이 얼굴에 와 닿을 정도로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하지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그의 행동에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
차건우도 그녀를 다시 한번 바라봤다.
얼굴은 붓고 엉망이지만 아부도 기대감도 없는 그녀의 담담한 태도가 오히려 더 차갑게 느껴졌다.
괜히 나섰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할아버지가 얼굴에 난 상처에 관해 물으시면 뭐라고 말할 건데?”
“제가 혼자 넘어졌다고 할게요.”
‘어쩐지 상처를 치료해준다 했더니... 내가 할아버지한테 고자질이라도 해서 좋아하는 사람의 이미지를 망칠까 봐 걱정한 거였어.’
그녀는 조용히 얼굴을 돌렸다.
“고마워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하민아 같은 여자를 좋아한다니... 정말 말도 안 돼.’
하지안은 저도 모르게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에 차건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웃어?”
“아니요. 어떻게 하민아 같은 여자를 사랑할 수 있는지 궁금해서요.”
그녀도 모르게 진심이 튀어나와 버렸다.
그 말을 내뱉고 나서야 하지안은 아차 싶었고 어두워진 차건우의 표정을 보고 움찔했다.
“뭐라고? 다시 말해봐.”
“그냥요... 당신 같은 사람이면 더 나은 여자를 만날 수 있지 않나 싶어서요.”
차건우는 차갑게 눈을 내리깔았다.
“어울리는지 아닌지는 내가 정하는 거야. 앞으로 입조심해.”
하지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
차건우는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차씨 가문 저택으로 돌아오니 어느새 밤 8시가 넘어 있었다.
다행히 차준혁이 집을 비운 터라 번거로운 질문도 피할 수 있었다.
하지안은 욕실로 들어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갔다.
목숨을 걸고 도망친 이후 처음으로 긴장이 풀렸다.
그녀는 배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아기야, 아직 엄마랑 같이 있지? 엄마는 널 믿어. 너도 엄마를 떠나기 싫지?”
‘내일 꼭 병원 가서 확인해 봐야지.’
머리를 말리고 방에서 나오니 차건우가 그녀에게 연고 하나를 던졌다.
하지안은 반사적으로 받아 들었다.
고맙다고 입을 열려던 찰나 차건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수신인을 보더니 얼굴을 굳히며 전화를 받았다.
“말해.”
“건우 씨...”
하민아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지금 건우 씨 집 앞에 있어요. 잠깐만 나와주면 안 돼요?”
차건우는 냉정하게 말했다.
“꺼져.”
그 말에 하민아는 더 처량히 울었다.
“나오지 않으시면 안 갈 거예요. 건우 씨가 절 버리겠다는데 가서 뭐 해요? 그냥 여기서 죽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안 갈 거예요!”
차건우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하민아가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건우 씨, 저랑 결혼하겠다고 했잖아요. 벌써 그 약속 잊은 거예요? 한 번만 더 기회 주면 안 돼요?”
하민아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하자 차건우는 짜증 섞인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두 시간 뒤, 고민석에게서 연락이 왔다.
“대표님, 만찬이 곧 시작됩니다. 저택 앞에 도착했습니다.”
“알았어.”
차건우는 무심히 응답하고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하민아는 그를 보자마자 매달리며 울먹였다.
“흑... 건우 씨, 오실 줄 알았어요. 역시 저를 버릴 수 없었던 거죠?”
“아직 안 갔어?”
“기다렸어요.”
하민아는 추위에 몸을 덜덜 떨었지만 눈빛은 설렘으로 가득했다.
“다행이에요. 저를 다시 봐주셔서.”
차건우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며 냉정하게 말했다.
“내가 차씨 가문 사모님 자리를 너한테 주겠다고 했지. 시간이 되면 자연히 너에게 돌아갈 거라고도 했고. 난 뒤에서 수작 부리는 여자가 제일 싫어. 알아들었어?”
하민아는 고개를 몇 번이나 연거푸 끄덕였다.
“알아요. 다 알아요. 하지만 저도 억울해요. 제가 질투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차씨 가문 사모님 자리가 욕심나서 그런 것도 아니에요. 그저...”
“그저 뭐?”
“언니가 임신했어요. 우리 가족은 그 사실이 너무 수치스러워서 시골로 데려가 낙태시키려 한 거예요. 그런데 언니가 도중에 도망쳤고 부모님은 너무 화가 나서... 그래서 건우 씨가 그런 장면을 목격하게 된 거예요.”
‘임신?’
차건우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싸늘했다.
“뭐라고? 다시 말해 봐.”
‘아무리 겁이 없다고 해도 내가 아닌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질 만큼 무모하진 않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제정신이 아닌가?’
하민아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내밀었다.
“건우 씨, 이거 혈액 검사지에요.”
차건우는 조용히 그 결과지를 펼쳤다.
그가 혹시 이해하지 못할까 봐 하민아는 친절하게 설명까지 덧붙였다.
“의사 선생님이 그러셨는데요. 임신 4주 차래요.”
“닥쳐!”
차건우의 한 마디에 하민아는 입을 틀어막고 꼼짝도 못 했다.
결과지를 응시하는 차건우의 몸에서 살을 에는 듯한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하... 정말이지 겁도 없는 여자네. 감히 나 몰래 바람을 피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