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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시간은 참 빠르게 흘러갔다. 비가 한 차례 지나가자 바람 끝이 차갑게 변하며 계절은 금세 가을로 접어들었다. 그날 하지안은 병원에서 어머니를 보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집으로 들어서자 하씨 가문의 도우미들이 분주히 장식과 조명을 달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는 순간 하지안은 손톱이 손바닥을 깊이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벌써 눈 깜짝할 사이에 15일이 지나 있었다. 내일이면 그녀는 나이 차이도 30살이나 나는 허민수와 결혼식을 올려야 했다. 꽃다운 나이, 가장 빛나야 할 시기에 그녀는 초야도 결혼도 인생도 송두리째 빼앗기고 있었다. “착각하지 마. 이건 널 위한 게 아니라 내 결혼식을 위해 준비하는 거거든?” 하민아가 비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내일 나도 결혼해.” 하지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연애한다는 말도 못 들었는데 갑자기 결혼한다고? 그것도 나랑 같은 날에?’ “내가 누구랑 결혼하는지 궁금하지 않아?” “안 궁금해.” 하지안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담담히 답했다. 그러나 하민아는 평소와 달리 화도 내지 않고 입꼬리를 올리며 비아냥댔다. “그래 봐야 소용없어. 내일부터 나는 경성에서 제일 고귀한 여자가 될 거야. 나한테 잘 보이면 콩고물이라도 떨어지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당장 이 도시에서 쫓겨날 줄 알아.” 그녀의 손끝이 목에 걸린 목걸이에 닿았다. 하민아는 차씨 가문으로 향하는 통행증을 하지안의 첫날밤으로 바꿔왔다는 생각만 해도 짜릿했다. 하지안은 그녀를 신경 쓰지도 않고 거실로 향했다. 고유정을 발견한 하지안의 표정이 변했다. “엄마, 여긴 어쩐 일이야?” “애도 참... 결혼하는데 왜 엄마한테 얘기도 안 했어? 네 아버지가 전화해서야 알았잖아.” 고유정의 나직한 나무람에 하지안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또 엄마로 협박하네. 짐승보다 못한 놈...’ “엄마, 몸도 안 좋은데 무리하지 마.” 하지안은 씁쓸함을 억누르고 겨우 고유정을 향해 웃어 보였다. 그러자 고유정이 나지막이 기침하며 답했다. “네 인생 중대사에 안 올 수 있겠어? 엄마로서 숨이 붙어있는 한은 당연히 와야지.” 그때 하지석이 들어왔다. “민아 혼수는 다 준비했어?” 서혜민이 거실 한쪽에 쌓인 예단 꾸러미를 가리키며 웃었다. “네. 여기 있어요.” 하지석이 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이게 다야? 가서 더 사와!” “알았어요. 더 장만할게요.” 두 사람이 하민아의 혼수를 아낌없이 챙기는 모습을 보며 하지안을 바라보던 고유정은 눈시울을 붉혔다. 그녀는 저미는 마음을 다잡으며 물었다. “지안아, 시집갈 땐 예단, 예물, 한복, 장신구, 이불 세트 같은 건 꼭 있어야 해. 준비했니?” 고유정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던 하지안이 거짓말을 했다. “응, 다 샀어.” “그럼 엄마랑 한번 같이 가서 보자. 모자란 게 있으면 지금이라도 가서 사야지. 엄마가 같이 가줄게.” “엄마, 걱정하지 마. 모자란 건 없어.” 더 이상 이 화제를 이어 나가고 싶지 않았던 하지안이 말을 돌렸다. “같이 나가서 맛있는 거 먹고 병원에 데려다줄게.” 고유정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네 아버지가 하나도 준비 안 했구나?” 하지안이 대답하기도 전에 안색이 어두워진 고유정은 곧장 하지석을 따라 2층 서재로 올라갔다. “하지석, 민아 혼수는 살뜰히 챙기면서 우리 지안이는? 지안이도 당신 딸이야!” 고유정이 다시 한번 눈시울을 붉혔다. “지안이한테 집 사주고 차 사주고 이런 건 바라지도 않아. 그래도 최소한의 도리는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민아 혼수 챙겨주면서 같이 사면 됐잖아!” 쾅! 하지석이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싸늘하게 답했다. “그 애한테 받을 자격이나 있다고 생각해?” 고유정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뜻이야?” 옆에 있던 서혜민이 냉소하며 답했다. “민아랑 비교가 되나요? 우리 민아는 깨끗한 몸으로 정정당당하게 결혼하는데... 그것도 재벌가로. 지안이는? 늙은 남자한테 팔려 가는 건데 하씨 가문의 망신이나 다름없죠. 그런 애한테 혼수가 가당키나 해요? 아... 혹시 미래 사위 아직 못 봤어요? 여기 사진 있으니 얼른 한번 봐요.” 말을 마친 서혜민이 허민수의 사진 한 장을 고유정에게 내밀었다. 사진 속의 허민수는 머리숱도 없고 배가 불룩 나와 있었다. 고유정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며 분노로 일그러졌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이랑 하지석이 내 딸을 망치는 꼴을 그냥 보고 있지만은 않을 거야!” 그러나 그녀는 곧 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원들에 의해 뒷문으로 끌려갔다. 고유정은 몸부림치며 절규했다. 목이 터져라 울다 보니 눈이 퉁퉁 붓고 시야마저 흐릿해진 그녀는 무언가를 떠올린 듯 갑자기 힘을 빼고 저항을 멈췄다. 그녀는 손을 떨며 핸드폰을 꺼내 한 번호를 눌렀다. 긴 신호음 끝에 마침내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어르신, 어르신께서 저희 아버지랑 하신 약속 아직 기억하세요? 부탁이 있습니다. 꼭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 한편 방 안에 있던 하지안은 한참을 기다려도 고유정이 돌아오지 않자 다급히 서재로 향했다. 그녀의 발소리를 들은 하지석이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야?” “엄마는요?” “몸이 안 좋아서 네 계모한테 병원에 데려다주라 했다.” 하지안은 주먹을 꼭 움켜쥐었다. “굳이 그 사람 보낼 필요 없어요.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너도 내일 결혼식이지 않느냐. 네 엄마 걱정은 하지 말고 가서 짐이나 챙기고 일찍 쉬어라. 네 계모도 병원에 수납하러 겸사겸사 간 거야. 남은 병원비 수납과 신장이식 수술은 네 결혼식이 끝나고 진행하기로 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하지안은 그냥 돌아서려 했다. 비록 하지석과 서혜민이 그렇게까지 배려할 리 없다는 걸 알았지만 지금 하씨 가문이 자신을 허민수에게 시집보내야 하는 상황인 만큼 당분간은 엄마에게 손대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석은 야위고 작은 등을 보며 드물게 죄책감을 느꼈다. “지안아, 결혼하면 너도 이제 어엿한 어른이야. 허민수랑 잘 지내봐. 비록 나이가 많고 인물이 출중하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사람은 그래도 꽤 괜찮아.” 하지안은 비웃듯 웃으며 차갑게 그를 바라봤다. “정말 그 사람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확신하세요?” 하지안의 직격에 말문이 막힌 하지석은 굳어진 얼굴로 버럭 소리쳤다. “나가!” 다음 날 아침, 하씨 가문은 시끌벅적했다. 하지안와 하민아, 두 신부가 나란히 앉아 메이크업을 받고 있었다. “민아야, 역시 어릴 때부터 복이 많더라니... 차씨 가문에 시집갈 줄은 몰랐어. 정말 너무 축하해. 앞으로 이 외숙모 잊으면 안 된다?” “그래. 민아야, 네가 차씨 가문에 들어가면 우리 하씨 가문도 이제 앞날이 창창하지 않겠니?” “우리 민아 정말 복은 타고났어. 너무 부럽네.” 집에 먼저 온 친척들이 하민아를 에워싸고 너도나도 아부했다. 얼굴 가득 웃음을 띤 하민아는 뿌듯함을 감추지 못했다. 사람들의 찬사와 관심이 쏟아지는 한가운데에서 그녀는 고개를 치켜들고 하지안을 힐끗 내려다봤다. 하지안의 주위에는 말을 건네는 사람은커녕 몇몇은 대놓고 손가락질하며 비아냥거렸다. 하지안은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표정 없이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메이크업을 마친 두 사람이 결혼식장으로 출발하려 하씨 가문을 나섰다. 왼쪽에는 검은색 고급 세단이 있었고 오른쪽에는 사치스럽게 치장된 롤스로이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 배가 너무 불뚝해 턱시도 단추조차 제대로 잠그지 못한 허민수가 다가왔다. 옆에 있던 하민아와 친척들은 그 모습을 보고 입을 가리고 웃느라 바빴다. 허민수는 그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하고 하지안의 손을 맞잡았다. “지안아, 오늘 너무 예쁘네. 본식 시간 다 된다. 얼른 가자.” 하지안은 속으로 구역질을 삼키며 무표정하게 그의 손에 이끌려 차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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