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문이 열리는 순간 수십 개의 플래시가 하지안을 향해 터졌다.
하지안은 눈앞이 순간 하얘졌다.
그녀의 시선 끝에 숨이 막힐 만큼 화려한 결혼식장이 펼쳐졌다.
발 디딜 틈 없이 꽉 찬 하객들은 환하게 웃고 박수가 폭죽처럼 터졌다.
하지안은 손가락을 꽉 움켜쥐고 숨을 골랐다.
그녀는 한 걸음, 또 한 걸음 거대한 무대 위에 오른 배우처럼 레드카펫을 끝까지 걸어 나갔다.
사회자가 얼굴 가득 미소를 띠며 말했다.
“자, 이제 저희 신랑님을 모시겠습니다!”
그러나 레드카펫 반대편은 텅 비어 있었고 사회자는 그 모습에 멈칫했다.
순간 연회장 전체가 충격과 웅성거림으로 뒤덮였다.
결혼식 당일 신랑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차준혁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망할 놈, 결혼식에서 이렇게까지 장난을 치다니!’
그는 곧바로 차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들려온 건 차가운 기계음뿐이었다.
손님들은 수군거리며 하지안을 조롱 했고 현장은 한순간 어색해졌다.
차준혁이 눈치를 주자 경호원이 곧바로 달려왔다.
그가 싸늘히 가라앉은 눈빛으로 명령했다.
“당장 둘째를 데려와.”
말을 마친 차준혁이 사회자에게 눈빛을 주었다.
사회자는 의미를 알아차리고 흐름을 이어가며 신부를 위한 축사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하객으로 앉아 있던 한재혁이 차건우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면에 차건우의 모습이 비치자 한재혁은 참지 못하고 비꼬았다.
“겨우 시간 내서 결혼식에 참석했는데 도망을 쳐?”
차건우는 얇은 입술을 비틀며 말했다.
“그 여자는 내가 결혼하려던 여자가 아니야.”
“너희 할아버지 얼굴 완전 어두워지셨어.”
차건우는 더 이상 이 화제를 이어 나가기 싫다는 듯 말했다.
“나와, 로비에서 기다릴게.”
“나 지금 네 결혼식 밥도 먹어야 해서 바빠.”
한재혁이 장난스레 말하며 카메라를 연회장 중앙으로 돌렸다.
“봐봐, 신부가 얼마나 불쌍하고 외로운지.”
차건우가 무심히 답했다.
“그렇게 외로워 보이면 네가 올라가서 옆에 있어 주든지.”
“쯧...”
그때 무대 위에서 사회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제 신랑 신부가 반지를 교환하겠습니다.”
손님들은 이 안쓰러운 신부가 난처한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지 궁금해했다.
한재혁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신랑도 없는데 반지를 어떻게 교환해?”
차건우는 신경도 쓰지 않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하지안을 바라봤다.
허리를 곧게 편 하지안은 하객들의 수군거림을 듣지 못한 듯 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엄마의 소원이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결혼식을 끝까지 마칠 거야. 모두가 비웃어도 상관없어.’
하지안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신랑 반지는 저한테 주세요.”
사회자가 건넨 반지를 받아 든 하지안은 신랑을 대신해 자신의 손에 반지를 끼웠다.
이를 본 차건우의 눈빛이 한층 어두워졌다.
‘이런 굴욕까지 견디면서 차씨 가문에 들어오려고 하다니... 제법이네.’
흥미를 잃은 차건우는 전화를 끊고 차씨 가문 저택을 나섰다.
문 앞에 쪼그려 앉아 오래 기다리고 있던 하민아는 차건우를 발견하고 서둘러 웨딩드레스를 붙잡고 따라갔다.
“건우 씨, 오늘 우리 결혼식 아닌가요?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어요? 제가 뭘 잘못했나요?”
하민아는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설마 그날 밤 호텔에서의 진실을 알게 된 걸까?’
하민아는 묻고 싶었지만 감히 직설적으로 묻지 못하고 에돌려 물을 수밖에 없었다.
차건우가 침착하게 답했다.
“너랑은 상관없어. 약간의 변수가 생겨서 결혼식은 잠정 연기야.”
그 말에 하민아는 눈시울을 붉혔다.
“첫날 밤을 건우 씨랑 보냈을 때 저는 정말 너무 행복하고 기뻤어요. 제가 건우 씨한테 어울리는 여자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으니 첫날 밤을 보내고 나서도 지위나 명분은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갑자기 결혼식이 취소되어서 하객들은 수군거리고 엄마도 충격으로 쓰러지셨어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애처로워 보이는 하민아의 모습에 차건우의 마음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첫날밤을 준 하민아가 결혼식까지 빼앗겼으니 그의 마음 한쪽에 죄책감이 있었다.
“걱정하지 마. 너랑 결혼할 거야. 다만 지금은 안 돼.”
하민아는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그럼 얼마나 기다려야 하나요?”
“8개월.”
하민아는 눈을 크게 뜨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그렇게 오래요?”
“못 기다리겠다면 강요할 생각은 없어. 결혼식을 취소한 거에 대해 보상은 따로 해줄게.”
“기다릴 수 있어요. 건우 씨가 결혼하겠다고 하면 얼마든 기다릴 수 있어요.”
하민아는 더 이상 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본인의 의지를 확실히 밝혔다.
“그래. 조금만 더 참아 줘.”
그러나 마음속 한편은 여전히 쓰라렸다.
하민아는 참지 못하고 조심스레 물었다.
“건우 씨, 왜 언니랑 결혼하려고 한 거예요? 전부터 알고 지냈나요?”
“몰라. 본 적도 없어. 하지만 어른들께서 어릴 적부터 혼인을 약속하셨다고 하셔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야.”
그 말에 하민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건우 씨, 시간도 됐는데 결혼식 잘 치르세요. 저는 먼저 돌아갈게요.”
하민아는 겉으로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속으로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단 한 걸음만 더 가면 차씨 가문 사모님이 될 수 있었는데... 그년이 차씨 가문에 시집가는 꼴을 봐야 하네? 하... 천한 년!’
시선이 웨딩드레스로 향한 차건우가 담담히 말했다.
“데려다줄게.”
그 말에 하민아는 밝게 웃으며 차건우에게 팔짱을 꼈다.
“좋아요.”
결혼식이 끝나니 어느덧 저녁이었다.
하지안은 장민숙과 함께 방으로 향했다.
방은 흑백 톤의 세련된 인테리어에 고급스러움이 가득했다.
하루 종일 긴장과 피로 속에서 버텨온 탓에 하지안의 발뒤꿈치는 하이힐에 까져 피가 배어 있었다.
그녀는 몸을 가누기도 힘든 상태에서 웨딩드레스를 벗고 조용히 샤워를 마친 후 침대에 누웠다.
낯선 공간에 있으니 몸은 피곤했지만 쉽게 잠들지 못했다.
이리저리 뒤척이며 몇 번이나 자세를 바꾼 끝에야 하지안은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
차건우가 밤새 돌아오지 않았지만 하지안은 신경 쓰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여덟 시.
장민숙이 하지안을 안내해 차준혁에게 인사를 드렸다.
단정한 하지안의 모습에 차준혁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지안아, 어젯밤에는 잘 잤니?”
“네, 방이 편안해서 잘 잤어요.”
“어제 고생 많았다. 걱정하지 마라. 이 할아버지가 건우를 따끔하게 혼내주마.”
말이 끝나자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저녁 내내 돌아오지 않았던 차건우의 모습이 보였다.
차준혁이 탁자를 쾅 치며 호통쳤다.
“무슨 낯짝으로 지금 돌아와!”
차건우는 얇은 입술을 비틀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 모습에 차준혁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불효막심한 자식! 감히 도망을 쳐? 너 때문에 차씨 가문 체면이 말도 아니야!”
“할아버지께서 저한테 한마디 말도 없이 결혼식 상대를 바꿨잖아요. 어른이라서 감히 따지지 않고 받아들였지만 그게 제 최선입니다. 결혼식까지 저한테 바라시는 건...”
“거만한 놈! 내 말이 우스워?”
차준혁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채 손에 든 지팡이를 높이 들고 내리쳤다.
쨍그랑!
책상 위에 있던 유리컵이 산산조각 나며 바닥에 튄 파편들이 긴장된 분위기를 더욱 날카롭게 만들었다.
하지안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조용히 손을 움켜쥐었다.
“네가 지금 차현 그룹을 관리하고 있다고 해서 뭐든 할 수 있을 거라 착각하지 말거라! 내가 아직 살아있어!”
차준혁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옷 벗어.”
차건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상의를 벗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마음대로 하세요.”
도발적인 차건우의 말투에 차준혁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는 이성을 잃은 듯 지팡이를 휘둘렀다.
짝!
지팡이가 차건우의 등을 세차게 후려쳤다.
짝! 짝!
등에는 금세 붉은 자국이 선명해지고 그 틈 사이로 피가 배어 나왔다.
하지안은 몸을 떨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지만 정작 차건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차분하게 고개를 들어 천장을 응시하며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고통을 드러내지 않는 차건우의 태도는 오히려 차준혁을 더 분노케 했다.
차준혁의 손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
미간을 찌푸린 하지안이 얼른 차준혁을 막아섰다.
“할아버지, 제가 갑자기 결혼하겠다고 해서 건우 씨 결혼식을 망쳤어요.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저를 벌해주세요. 아니면 너무 괴로울 것 같아요.”
차건우는 하지안을 스치듯 바라보았다.
그 시선엔 싸늘한 냉기와 경멸이 서려 있었다.
‘가식적인 여자...’
차건우와 눈이 마주치는 것이 두려웠던 하지안은 눈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차준혁이 얼굴을 붉히며 외쳤다.
“왜 지안이를 노려봐! 뭘 잘했다고 그렇게 싸가지없게 굴어!”
하지만 차건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더 때리실 건가요? 아니면 저 회사 갑니다. 회의가 있어서요.”
차준혁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분노를 참았다.
“결혼식은 그렇다 치고 아직 혼인 신고도 안 했잖아. 지금 지안이 데리고 구청 가서 혼인 신고하고 오거라.”
십 분 뒤, 두 사람은 나란히 검은 승용차에 올라탔다.
하지안은 차창 쪽에 몸을 기댄 채 앉았다.
차 안의 공기는 무겁고 숨 막힐 듯 답답했다.
40분쯤 지나 두 사람은 구청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어두운 표정으로 서류를 작성하고 직원에게 내밀었다.
잠시 후, 직원이 두 사람에게 접수증을 건넸다.
이제 하지안과 차건우는 법적인 부부가 된 셈이었다.
구청을 나선 하지안은 지금 상황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내가 지금 꿈꾸고 있나? 정말 이렇게 결혼했다고?’
차건우는 한 번도 그녀를 바라보지 않고 그대로 차에 올라 떠났다.
하지안은 택시를 잡아 차씨 가문 저택으로 돌아왔다.
이틀 동안 온갖 일을 겪은 그녀는 지쳐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꿈속에서 초록빛 눈을 가진 사나운 늑대가 뒤쫓았다.
필사적으로 달리든 하지안은 발을 헛디뎌 절벽 아래로 떨어졌고 그녀는 몸서리치며 꿈에서 깨어났다.
차건우가 침대 옆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갑자기 돌아온 거지?’
눈이 휘둥그레진 하지안은 순식간에 잠기운이 달아나 버렸다.
“언제 돌아왔어요?”
차건우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내 방이야.”
그 말에 하지안은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나 눈치껏 소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차건우는 상의를 벗은 채 슬랙스만 걸친 상태였다.
그의 상반신이 드러나는 순간 하지안은 당황한 듯 시선을 돌렸다.
똑똑똑.
그때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하지안은 조심스럽게 문 쪽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장민숙이 서 있었다.
“사모님, 이건 둘째 도련님 약이에요. 직접 좀 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하지안은 문을 닫고 조심스레 방 안으로 들어섰다.
차건우는 등을 돌린 채 서 있었고 그의 등에는 상처들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핏자국이 선명히 남은 등은 보는 이조차 숨을 삼키게 했다.
하지안은 약을 건넸다.
차건우는 약을 손에 덜어 상처에 바르려 했지만 등 윗부분은 팔이 닿지 않아 몇 번이고 시도했음에도 실패하고 말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지안이 나지막이 말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차건우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차가운 태도에 하지안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더는 나서지 않았다.
하지안이 소파에 누우려는 순간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서 발라.”
차건우의 말에 하지안은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다시 슬리퍼를 신었다.
‘어쩌겠어. 이 집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냥 참아야지.’
속으로 그렇게 다짐한 하지안은 조용히 약솜과 소독약을 챙겨 그의 등 뒤로 다가갔다.
소독약을 적신 면봉으로 상처를 살짝 닦자 등에 난 깊은 자국 사이로 붉은 살점이 벌어져 있는 게 눈에 띄었다.
하지안은 본능적으로 숨을 삼켰다.
알코올이 상처에 닿자 차건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등을 약간 움찔거렸다.
그 순간 하지안은 반사적으로 그의 상처 쪽에 후하고 숨을 불어넣었다.
그 따뜻한 숨결이 상처에 닿자 차건우는 등 근육을 팽팽히 조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갑작스러운 말에 하지안은 화들짝 놀라 손을 떨었고 그 바람에 면봉이 상처 속으로 깊게 들어가고 말았다.
“후...”
차건우는 고통을 억누르며 날숨을 짧게 뱉었다.
피가 번지며 상처가 더 깊어졌다.
당황한 하지안이 허둥지둥하며 해명했다.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갑자기 말씀하셔서 놀랐어요.”
“조금 전에 그 행동은 뭐야? 설마 유혹이라도 하는 거야?”
“그게 아니라요... 어릴 때 제가 다치면 엄마가 늘 다친 곳에 바람을 불어주셨어요. 불면 안 아프다고 하던 게 생각나서 저도 모르게...”
하지안의 말에 차건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비웃듯 말했다.
“유치하네. 그런 속임수, 나한텐 안 통해.”
하지안은 더는 변명하지 않고 그저 말없이 상처 위에 약을 발라주며 손을 움직였다.
밤은 깊어졌고 방 안은 조용해졌다.
하지안은 차건우의 규칙적인 숨소리를 들으며 천장을 바라봤다.
한 방에서 남자와 함께 있는 건 처음이라 마음이 불안하고 잠도 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잠을 설친 하지안은 퀭한 다크서클을 한 채 식탁에 앉았다.
차준혁이 상석에 앉고 두 사람은 나란히 옆에 앉았다.
식탁 위엔 정갈하고 풍성한 아침이 차려져 있었지만 입맛이 없던 하지안은 겨우 죽만 한술 떴다.
그때 차준혁이 차건우를 힐끔 보며 말했다.
“밥 다 먹고 지안이랑 하씨 가문에 다녀와라. 최소한의 형식이라도 갖춰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