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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병원을 나온 하지안은 급히 택시를 잡아 세우고 주소를 불렀다. 반 시간쯤 지나자 차는 좁고 음습한 골목 입구에 멈췄다. 하지안은 그 안쪽 허름한 문 앞에서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문이 열리자, 삐쩍 마른 고유정의 모습이 나타났다. 하지안을 본 순간 그녀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지안아, 어쩐 일이야? 어서 들어와.” 방은 고작 6~7평 남짓이었고 잡동사니가 가득 쌓여 있었지만 정갈하게 정리돼 있었다. 창문 하나 없는 방은 대낮에도 불을 켜야 했고 탁자 위에는 양념 하나 없는 맨 국수 한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 광경에 하지안의 눈가가 붉어졌고 참았던 눈물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엄마, 할아버지가 병원비 다 내줬다면서? 왜 거짓말했어?” 고유정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 손수건으로 딸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지안아, 사람은 너무 욕심내면 안 되는 거야. 어르신이 우리 집안 가난한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어릴 적 약속 지켜주셨는데 그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야.” “하지석한테 가서 따질래요!” “안 돼! 그러지 마!” 고유정은 단호하게 외쳤다. “또 그 인간한테 손 벌려서 치료받으면 뭐 하니? 네가 억지로 나이 많은 늙은이한테 팔려 가야 할 텐데...” 하지안은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훔쳤다. 그런 딸을 바라보는 고유정의 입꼬리가 쓸쓸하게 휘었다. “나는 말이야... 죽는 한이 있어도 그 사람들이 내 딸 인생 망치는 꼴은 못 봐. 원수 같은 놈 돈으로 내가 치료받고 싶겠니? 자존심도 없이?” “그럼 나 혼자 두고 갈 거야? 딸이 매일 이렇게 멸시당하는데 그걸 두고 갈 수 있겠어?” 고유정은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엄마는 아직 치료 포기한 거 아니야. 우리 지안이가 돈 벌어서 나 치료해 줄 거잖아. 그렇지?” 그 말에 하지안은 입꼬리를 올려 보려 했지만 차마 웃음을 지을 수는 없었다. 하지안의 손에는 돈 한 푼 없었고 고유정을 치료하려면 몇천만 원은 훌쩍 들었다. 몇백만 원의 월급을 전부 모은다고 해도 2, 3년 걸릴 텐데 그때까지 고유정이 버틸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엄마, 나 오늘 여기서 잘래. 같이 있고 싶어.” 고유정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안 돼. 신혼 때부터 외박이라니. 시댁에서 뭐라 하겠니. 어서 들어가.” 밤 8시가 되어 고유정의 거듭된 재촉에 하지안은 결국 눈물만 머금고 골목을 나섰다. 차씨 가문 저택에 도착한 건 밤 10시쯤이었다. 어두운 집안을 보니 차건우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듯했다. ‘하민아와 함께 하씨 가문에 머물고 있겠지.’ 하지만 하지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서로 감정 없는 계약 결혼이었다 보니 처음부터 기대는 없었다. 소파에 누운 하지안은 고유정의 치료비를 걱정하다 보니 쉽게 잠들지 못했다. 그때 문득 차건우가 하민아에게 건넨 블랙카드가 떠올랐다. ‘내가 하민아를 부러워할 날이 다 오네.’ 그녀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절친 임수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진아, 혹시 일자리 없을까? 뭐든 괜찮아. 파트타임도 돼.” 전화기 너머로 하품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인스타 보다가 봤는데 퍼플바에서 야간 청소 알바 뽑는다던데? 밤 8시부터 새벽 6시까지래. 할 수 있겠어?” ‘술집?’ 망설이던 하지안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 결국 타협했다. “주소 보내줘.” 이틀 뒤, 하지안은 그 일에도 어느 정도 적응하고 있었다. 화장실 청소를 막 마치고 앉으려는 찰나 매니저가 다가왔다. “유니폼 갈아입고 408호에 술 서빙 좀 해.” “전 청소 담당이라서 서빙은 제 일이 아닌데요.” 하지안이 나지막이 항의하자 매니저는 짜증을 냈다. “사람이 부족해.” 하지안이 움직이지 않자 진태현이 외쳤다. “못 하겠으면 그냥 다 때려치워.” 돈이 필요했던 하지안은 결국 타협하고 유니폼을 갈아입은 뒤 408호 룸으로 향했다. 방 안은 담배 냄새로 가득했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주문하신 술 가져왔습니다.” 그 말에 소파 구석에 앉아 있던 한 남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허민수였다. 하지안은 깜짝 놀라 연신 뒷걸음쳤다. “결혼식 날 도망간 신부가 여기 웬일이야? 아직 그때 얘기도 제대로 못 했는데 오늘은 네 발로 찾아온 거다?” 허민수가 도망치려던 하지안의 팔을 덥석 잡고 팔짱을 두른 뒤 밖으로 데려가려 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하지안이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남자의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 마침 복도를 지나던 두 사람의 눈에 그 장면이 들어왔다. “어? 저 사람 형수...” 한재혁이 눈을 깜빡이며 차건우의 눈치를 보더니 호칭을 바꿨다. “갓 시집온 새 신부 아니야? 벌써 양다리야?” 차건우의 미간이 굳게 찌푸려졌다. 그의 시선이 머문 곳엔 검은색 끈 달린 짧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있었다. 치맛자락은 간신히 엉덩이를 가릴 정도였고 하얗고 가느다란 다리가 드러나 있었다. 차건우의 눈빛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한재혁은 입가에 웃음을 띠며 팔짱을 꼈다. 안 그래도 강 건너 불구경하기 좋아하는 한재혁은 유유히 복도 벽에 기댄 채 지켜보기 시작했다. 하지안은 걸음을 빨리해 허민수를 떨어뜨리려 했다. 하지만 허민수는 빠르게 하지안의 의도를 눈치채고 바로 벽으로 몰아세워 몸을 밀착시켰다. “와서 둘러싸.” 곧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와 두 사람을 포위했다. 하지안의 가슴은 거칠게 오르내리고 온몸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오지 마! 제발 비켜!” 허민수는 비웃듯 코웃음을 치며 낮게 말했다. “비키라고? 전에 못 치른 첫날 밤을 오늘 제대로 치러야겠어!”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성급하게 하지안의 원피스를 잡아 내리려 했다. 하지안은 속으로 수없이 자신을 다독였다. ‘침착해. 흔들리지 마. 얼른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야 해.’ 그 순간 구석에서 누군가 중얼거렸다. “벌써 바지를 벗기 시작했네.” 한재혁이 손가락을 덜덜 떨며 앞쪽을 가리키더니 장난스럽게 읊조렸다. “풀잎은 푸르러지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살기가 온몸을 덮치자 한재혁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한재혁은 급히 기침을 두어 번 해 분위기를 수습하려 애썼다. “내 생각엔 말이야... 강제로 끌려간 걸 수도 있지 않을까? 솔직히 남자를 꼬시려 했다면 너를 꼬셨겠지. 너는 잘생겼지 돈도 많고 복근도 있잖아. 그런데 저 남자 좀 봐봐. 임신 8개월보다도 배가 더 커. 눈이 멀었거나 제정신이 아닌 이상 본인이 걸어 들어갈 일은 없잖아? 가서 확인해 볼까?” “그래.” 차건우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비록 계약으로 맺어진 부부라 해도 최소한의 선은 있는 법이었다. 차건우는 긴 다리를 뻗으며 천천히 앞으로 나섰고 뒤이어 한재혁도 신나게 따라붙었다. ‘공주님은 왕자가 구해야 하는 법이지.’ 그러나 몇 걸음 가지도 않아 여자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복도에서 하면... 창피하잖아요. 방으로 가요. 네?” “그래그래. 네 말대로 하자.” 허민수의 목소리는 한껏 풀려 있었다. 그는 하지안을 끌어안은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 안으로 향했다. 순간 주위 온도가 얼어붙듯 차갑게 떨어졌다. 차건우는 계단 끝에 멈춰 섰다. 뒤따라오던 한재혁이 미처 제때 멈춰 서지 못하고 그의 넓은 등을 들이받았다. 한재혁은 콧등을 문질러가며 불평하듯 물었다. “왜 멈춰? 안 가?” 차건우의 눈빛은 혐오로 가득 차 차갑게 번뜩였다. “남 좋은 일을 굳이 망칠 필요는 없지.” 그 말과 함께 차건우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그 뒷모습은 점점 멀어지다 결국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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