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차건우의 비아냥은 날카롭고 가시 돋쳐 있었다.
하지안은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눌러 삼키며 깊게 숨을 들이켰다.
“맞아요, 언제나 바빠요. 전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 물고 태어난 대단한 도련님이 아니라서 일해서 돈을 벌 수밖에 없어요. 아니면 그냥 공기만 마시며 살란 말이에요?”
그 말에 차건우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정말 신기한 여자네. 뻔뻔하면서도 당당한 건 대체 어디서 배운 건지.”
하지안은 얼굴을 찌푸리며 맞섰다.
“정말 이상한 건 당신 같은 부자들이에요. 난 열심히 일하고 있을 뿐인데 그게 왜 뻔뻔하다는 거죠?”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의 얼음장 같은 눈빛이 다시 그녀를 꿰뚫었다.
“누가 너한테 여기 와서 날뛰라고 했어? 네가 정말 차현 그룹 며느리라도 된 줄 알아? 당장 꺼져.”
“첫째, 전 여기서 날뛴 적 없고 열심히 일하고 있었습니다. 둘째, 제 신분이 어떤지는 저도 잘 압니다. 감히 며느리 행세 같은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하지안은 손을 꽉 쥐며 그를 노려봤다.
“그러니 차 대표님, 사람을 너무 괴롭히지는 마시죠.”
차건우는 헛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성큼 다가왔다.
“결혼식 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차씨 집안에 들어오더니 술집에서 우연인 척 마주치고 이제는 회사까지 쳐들어와 정체를 드러내? 네가 계획한 일이라고 하는 게 맞을까? 내가 괴롭힌다는 게 맞을까?”
깜짝 놀란 하지안이 두 걸음 물러섰다.
“아니에요. 저는 회사에 제 신분을 내세우려고 온 게 아니라 정말 일하려고...”
차건우가 싸늘한 말투로 물었다.
“누가 보낸 거야?”
“할아버지요.”
하지안은 입술을 깨물며 솔직히 답했다.
그 말에 차건우의 표정이 완전히 얼어붙었다.
“대단하네. 이제는 할아버지까지 홀려서 네 편으로 만들었어? 착각하지 말고 지금 당장 이 회사에서 나가.”
그 말에 하지안의 심장이 조이듯 아파졌다.
“전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요. 대표님께서 이유 없이 절 해고하실 수는 없어요.”
이 일자리는 그녀에게 너무 소중했다.
‘술집도 그만뒀는데 이 일자리마저 잃으면 안 돼. 엄마 병원비도 걸려 있는데...’
차건우는 더는 말 섞을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명령했다.
“고민석.”
고민석이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사모님, 가시죠.”
하지안은 움직이지 않았다.
차건우가 걸음을 옮기려 하자 하지안은 급히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대표님, 전 정말 이 일이 필요해요. 무슨 일이든 두 배로 성실히 하겠습니다. 제발 회사에서 내보내지 말아 주세요.”
그의 눈빛은 여전히 차갑기만 했다.
“차현 그룹은 자선기관이 아니야. 손 떼.”
“싫어요!”
하지안은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믿어 주세요. 8개월만 지나면 조용히 이혼 서류에 도장 찍을 거예요. 맹세해요. 그러니까 제발 회사에만 남아 있게 해주세요.”
차현 그룹의 연봉은 다른 회사보다 높았고 하지안은 그런 일자리를 잃을 수 없었다.
눈빛이 더욱 냉혹해진 차건우는 차갑게 비웃었다.
“굳이 맹세할 필요 없어. 그때가 되면 네 의사 따윈 필요 없어.”
“제가 다른 마음을 품은 거라고 의심하는 거면 맹세할 수 있어요. 저는 차 대표님한테 다가가려고 회사에 있으려는 게 아니라 가족이 아파서 돈이 필요해서 그래요.”
하지안은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스스로 상처를 드러내는 것 자체가 마음 아팠지만 엄마의 목숨에 비하면 자존심 따위는 사치였다.
차건우가 싸늘히 웃었다.
‘이젠 동정심 자극 작전인가?’
“네 가족이 죽든 살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마지막 경고야. 당장 꺼져. 안 나가면 사람 불러 끌어낼 거야.”
그녀의 손이 슬며시 소매에서 떨어졌다.
하지안은 눈에 핏발이 선 채 참았던 감정을 터뜨렸다.
“정말 자기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나 보죠? 재벌가에서 태어났다는 거 하나 빼고 당신은 뭐가 그렇게 잘났어요? 접근하는 여자들이 다 불건전한 마음을 품었다고 착각하지 마요. 저도 엄마가 아프지 않았다면 당신 같은 사람하고 절대 결혼 안 했어요! 당신은 정말 냉혈한이에요! 그러니까 사람이 죽든 말든 신경 안 쓴다는 말이나 하죠!”
그 말에 차건우의 눈매가 날카롭게 빛났다.
공기마저 숨 막히게 얼어붙었다.
고민석은 식은땀을 흘리며 눈치만 살폈다.
그때 갑자기 핸드폰 벨 소리가 울리며 정적을 깼다.
차건우는 화면을 흘끗 보고 전화를 받았다.
차준혁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지안이는 회사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어? 회사 식당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네가 데리고 나가서 같이 먹어.”
차건우는 무표정하게 듣기만 했다.
“이 녀석, 듣고 있긴 한 거냐? 옛날에 지안이 할아버지가 날 살려주지 않았다면 오늘의 차현 그룹도 없었을 거다. 내 목숨을 건진 은인의 손녀야. 건우야, 제발 부탁이다. 조금만이라도 잘 돌봐다오.”
차준혁의 한숨이 묻어나는 음성에 차건우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낮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때 고민석이 얼른 나섰다.
“사모님, 이쪽으로 가시죠.”
“됐어요. 저도 다리가 있어요.”
몸을 돌리자 참아왔던 눈물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어두운 얼굴을 한 하지안은 두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마치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간 듯했다.
‘정말 무기력하네... 일자리 하나 보존하지 못하고...’
그녀가 문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차건우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잠깐.”
하지안은 돌아보며 매섭게 물었다.
“이미 나가겠다고 했잖아요. 더 이상 뭐 어쩌라는 건데요.”
차건우는 대답 대신 고민석을 향해 명령했다.
“청소부 쪽으로 배치해.”
하지안은 멍하니 굳었다.
‘무슨 뜻이지?’
잠시 후 고민석은 고개를 끄덕이고 하지안을 데리고 나갔다.
소파 뒤에 숨어 있던 한재혁이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차건우는 그를 힐끗 보며 말했다.
“재밌는 구경 다 했냐?”
한재혁은 헛기침하며 웃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난 원래부터 여기 있었다고? 그런데 할아버지가 잘 부탁한다고 했는데 너는 또 청소부에 배치하냐?”
“일이 필요하다길래 할아버지 체면을 봐서라도 준 거야.”
차건우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냉담하게 답했다.
“좋아하든 싫어하든 상관없어. 못 버티겠으면 알아서 나가겠지.”
“에휴... 어쩌다 너 같은 남편을 만나서... 하지안 씨 인생도 참 기구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