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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서울 군부대 병원, 이서하는 해외에서 돌아온 젊은 인재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병원 외과 최연소 과장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수많은 대형 수술을 직접 집도해 온 그녀의 두 손은 의사로서의 생명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귀한 손이 지금은 누군가의 군화에 짓밟힌 채 가차 없이 짓이겨지고 있었다. 그 발의 주인은 다름 아닌 이서하의 남편이자 부대 사단장인 강태민. 그는 의자에 앉아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각 잡힌 군복은 흐트러짐 하나 없었고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마치 지금 벌어지는 일이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듯이. 그리고 닫힌 문 너머에서는 이서하의 여동생이 몇 명의 사내들에게 밀려 침대에 눕혀지고 있었다. 이내 이서하의 귀에는 공포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 도움조차 제대로 청하지 못한 채 내뱉는 절규가 끊임없이 들렸다. 그 소리 하나하나가 지금 이서하의 마음을 너무 아프게 만들었다. “이서하, 지금 당장 가서 나연이 엄마 수술을 도와줘. 만약 거부한다면 바로 네 여동생 방문을 열 거야. 그러면 서울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지금 네 여동생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똑똑히 보게 되겠지.” 이서하는 이를 꽉 깨물고 핏발이 선 눈으로 강태민을 쏘아보며 물었다. “강태민,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성나연 씨가 우리 엄마를 죽인 거... 너도 알고 있잖아! 성나연 씨 엄마가 뇌종양에 걸린 건 다 업보야. 넌 나더러 원수의 엄마 수술을 하라는 거야?” 한 달 전, 이서하의 어머니는 시장에서 장을 보던 중 성나연이 몰던 차에 치여 세상을 떠났다. 이서하는 즉시 고소장을 제출해 그녀를 법정에 세웠지만 사흘도 채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대신 범행을 인정하며 죄를 뒤집어썼다. 그렇게 진짜 가해자는 아무 일 없다는 듯 풀려났고 이서하는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는 법원에 몇 번이나 항소했지만 번번이 기각되었고 결국 병원에서는 직위까지 박탈당한 채 무기한 휴가 처분을 받았다. 절망의 끝자락에 서 있던 때, 성나연의 어머니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종양 위치가 너무 위험해 서울에서 그 수술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은 이서하뿐이었다. 당연히 그녀는 거절할 생각이었다. 자신의 부모님을 죽인 살인범의 가족을 살리라는 건 차라리 죽는 것보다 더 싫었으니까. 그러나 어느 날, 그녀는 강제로 접대소에 끌려갔고 그곳에서 강태민을 마주치자마자 이서하는 모든 걸 깨달았다. 겉으로는 자신을 사랑하듯 행동하던 남편의 마음속에는 처음부터 다른 여자가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서하야, 네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아.” 줄곧 침묵하던 강태민의 첫 마디에 이서하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마지막으로 3분 줄게. 그래도 나연이 어머니 수술을 거부한다면 지금 당장 사람 시켜서 네 여동생 방문을 열 거야. 그러면 서울에 있는 모두가 네 여동생이 여러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똑똑히 보게 되겠지.”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이런 말을 덧붙였다. “이서하, 이 시대에서 학생의 명성이 망가졌을 때 어떤 결말을 맞는지... 너도 잘 알잖아.” 순간, 멀리서 들리는 여동생의 처절한 비명에 이서하는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넌 나랑 결혼할 때 했던 약속을 다 잊은 거야?” 결혼식 날, 강태민은 이서하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했었다. “서하야, 오늘부터 네 가족은 내 가족과 다름없어. 내가 평생 지켜줄게.” 하지만 지금, 강태민은 그녀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이서하, 마지막 1분이다. 네 여동생의 운명은 지금 네 손에 달려 있어.” 이서하는 마지막 남은 희망마저 사라지는 것 같아 결국 이를 악물고 강태민이 원하는 말을 내뱉었다. “할게. 그 수술... 내가 할게.” 그제야 강태민은 만족한 듯 다가와 이서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서하 착하지? 수술 끝나면 보상으로 요즘 제일 유행하는 보석 세트 하나 줄게.” 이서하는 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보며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을 느꼈다. 곧이어 그녀는 곧바로 수술실로 옮겨졌고 열악한 장비 속에서 종양 제거 수술은 무려 12시간이나 이어졌다. 생각보다 더 길어진 수술에 이서하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수술실을 나섰다. 하지만 간호사가 다급히 달려와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이 선생님, 큰일 났어요. 접대소에서 이유나 씨가 여러 남자들과 얽혀 있는 장면이 사람들한테 다 들켰어요. 지금 그 영상은 서울 전역에 퍼지고 있고 충격에 휩싸인 이유나 씨가 투신하려고 해요.” 이서하는 그 말에 멍해졌다가 정신을 차리고 비틀거리며 달려 나갔다. '어떻게 이런 일이... 분명 나랑 약속했잖아. 수술하면 유나는 건드리지 않겠다고 했잖아!' 그 시각, 병원 옥상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고 이서하의 여동생은 마치 모든 걸 내려놓은 사람처럼 난간 끝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서둘러 옥상에 도착한 이서하는 공포에 질린 눈빛으로 동생을 보며 외쳤다. “유나야, 언니 왔어. 그러니까 제발 바보 같은 생각 하지 마. 다 지나갈 거야. 언니만 믿어.” 이유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이서하와 눈이 마주치자 비로소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언니, 왔어?” 이서하는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다가갔다. “유나야, 거기서 내려와. 제발 부탁이야. 난 너까지 잃을 수는 없어.” 하지만 이유나의 두 눈은 텅 비어 있었고 살고자 하는 의지는 이미 사라져 버린 듯했다. “언니, 미안해. 난 더는 살아갈 용기가 없어.” 그녀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더니 이서하를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언니, 난 이제 엄마 옆으로 갈게.” 짧은 한마디를 끝으로 이유나는 망설임 없이 뛰어내렸다. “안 돼! 유나야, 안 돼!” 이서하는 미친 듯이 달려들었지만 사랑하는 동생을 붙잡지 못했다. 이내 병원 보안요원들이 달려와 그녀를 붙잡았지만 이서하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이거 놔요! 전 이제 가진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어요. 전 가족을 다 잃었다고요!” 심장에서 처음 느껴지는 통증이 점점 세지자 이서하는 결국 피를 토해내며 의식을 잃어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소독약 냄새가 가득한 병실이었다. 정신을 차린 이서하는 마치 껍데기만 남은 사람처럼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간호사 스테이션으로 가 오랫동안 간직해 뒀던 전화번호에 전화를 걸었다. “그때 제시했던 조건, 받아들이겠습니다. 제 요구는 하나예요. 강태민과 성나연 씨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주세요.” 수화기 너머의 상대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낮고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한 달 뒤에 제가 직접 모시러 가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이서하는 곧바로 아는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당장 이혼 신청서 준비해 주세요. 군부대에서도 쓰일 수 있는 걸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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