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백 도련님...?’
순간, 한세희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그녀는 저항하는 것조차 잊은 채 멍하니 운전석 쪽을 바라보았다.
‘이도원이 사람을 보내 날 납치한 거야? 최지영한테 수혈해 주려고?’
이도원의 본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까지, 끝없는 공허함이 차가운 바람처럼 스며들었다.
뼛속까지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거칠고도 잔인한 힘에 떠밀려 병원까지 끌려갔다.
납치범은 혹시라도 한세희가 도망칠까 두려웠는지 그녀를 채혈용 침대에 뉘인 후 밧줄로 단단히 묶어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간호사가 들어왔다.
그녀는 한세희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은 채 차가운 바늘을 그녀의 팔 깊숙이 찔러 넣었다.
따끔한 통증과 함께 붉은 피가 서서히 한세희의 몸을 떠났다.
시야가 흐려지는 와중, 본능처럼 이도원과의 지난날이 파편처럼 떠올랐다.
한세희는 통증을 유난히 무서워했다. 피를 보는 것도 두려워했다.
어머니의 죽음을 처음 마주한 이후, 붉은 액체는 그녀에게 공포로 다가왔다.
이도원과 함께 지내던 시절, 맛있는 저녁을 해주겠다고 나섰다가 열 손가락에 상처가 잔뜩 난 적도 있었다.
그때의 이도원은 상처로 얼룩진 한세희의 손을 조심스레 감싸 입김을 불어가며 진심으로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시는 너 다치게 안 해.”
그 말이 너무나 달콤해서, 그 순간만큼은 영원히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국 이도원은 그 약속을 몇 번이고 아무렇지 않게 짓밟았고 최지영을 위해 한세희를 반복해서 상처 입혔다.
한세희는 그제야 말을 입 밖으로 뱉으면 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채혈을 마친 간호사는 일언반구 없이 쌩하니 채혈실을 나가버렸다. 기력이 거의 빠져버린 한세희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버거웠다.
천장을 멍하게 바라보는 사이, 문가에서 의도적으로 낮게 깐 목소리가 희미하게 흘러 들어왔다.
“도련님, 의사 말로는 한세희 씨 몸 상태가 너무 안 좋다던데... 보양이라도 시켜야 하지 않을까요?”
“필요 없어. 전부 자업자득이야. 지금까지 지영이한테 한 짓들... 내가 전부 되돌려줄 테니까.”
이도원이었다.
“하하...”
한세희는 어쩐지 이 상황이 우스웠다. 그녀는 조금의 기력을 회복하자마자 침대에서 내려와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을 뗄 때마다 현기증이 밀려와 몸이 휘청거렸다. 가쁜 숨과 불안한 걸음에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가볍게 꽂혔다.
그러다 한 병실 앞을 지나던 순간, 안에서 최지영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죽기 직전이라 피가 급하다더니, 그녀는 멀쩡히 앉아 갓 받은 네일을 감상하며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
“응? 이도원? 장난해? 내가 왜 그런 찌질이랑 사귀어. 그냥... 착한 언니 괴롭히는 맛이 좀 있어서 그런 거지. 참, 너 그거 알아? 백씨 가문 도련님이 나한테 관심 있대! 결혼한다면 당연히 그런 집안이랑 해야지. 이도원은 뭐, 쓰다 버리면 돼. 애완동물 같은 느낌이랄까?”
한세희는 주머니 속 휴대폰 화면에서 재생되는 녹음을 보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너는 날 버리려 하는데 최지영도 결국 너를 버리려 하고 있었네. 어쩌면 둘이 천생연분일지도 모르겠어.’
볼일을 마치고 병원을 떠나려는 순간 등 뒤에서 익숙하지만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세희?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