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주말 이틀을 쉬고 월요일 아침이 되자, 강유진은 평소처럼 제시간에 회사로 출근했다.
강유진은 늘 하던 대로 손에 쥔 업무를 처리하며, 윤태현에게 곧 회의가 있다는 일정도 확인했다. 그리고 회의 시간을 알리려고 대표실로 향했다.
대표실 문은 완전히 닫혀 있지 않았다. 살짝 열린 문틈 너머로 강유진은 서청아를 봤다.
서청아는 윤태현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고, 반쯤 먹다 남긴 쿠키를 윤태현의 입가에 가져다줬다. 늘 깔끔함에 예민하던 윤태현은 웃으며 그 쿠키를 받아먹더니 서청아의 손가락 끝에 살짝 입을 맞췄고 목소리마저 다정했다.
“어제 네가 여기 디저트 먹고 싶다고 했잖아. 그래서 아침에 세 시간 줄 서서 사 왔어. 맛은 어때?”
“맛있어. 예전이랑 똑같이 달기만 한 게 아니라 딱 좋네. 예전에는 네가 가끔 멀리까지 직접 가서 사 왔잖아. 이제는 그룹 대표인데도 왜 아직도 직접 가? 비서 시키면 되잖아.”
윤태현은 서청아의 발목을 살살 주무르며 웃었다. 눈빛에는 숨길 생각도 없는 애정이 가득했다.
“청아야, 너랑 관련된 일은 내가 직접 하고 싶어. 남의 손 빌리고 싶지 않아.”
그 말에 서청아의 얼굴에는 달콤한 기색이 번졌다. 서청아가 먼저 윤태현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고, 윤태현도 서청아를 끌어안은 채 키스를 깊게 이어 갔다. 둘은 그대로 빠져들어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강유진은 숨이 턱 막혔다. 가슴 한쪽이 서늘하게 저려 오더니, 곧 마음속의 통증이 천천히 번졌다.
강유진은 손가락을 꽉 쥐었다. 손마디가 하얗게 질렸고,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손바닥이 얼얼했다.
시간은 흐르고 회의 시작 시간이 가까워졌다.
강유진은 억지로 숨을 고른 뒤 문을 두드렸다.
“윤 대표님, 회의 곧 시작합니다.”
강유진의 목소리가 들리자 윤태현이 잠깐 멈칫했다. 윤태현이 일어서려는 순간, 서청아가 윤태현을 다시 끌어당겼다.
“태현아, 아직 안 돼. 조금만 더 같이 있어 줘.”
서청아가 그렇게 애교를 부리자 윤태현은 표정이 순식간에 풀렸다.
“회의를 두 시간 미뤄.”
그 회의는 서울에서 손꼽히는 몇 개 그룹이 함께 추진하는 협력 사업 건이었다. 회사의 향후 방향까지 걸린 중요한 자리였다. 강유진도 그 무게를 알았다. 그래서 참고 한 번 더 조심스럽게 말했다.
“임화 그룹이랑 구명 그룹, 신우 그룹 대표님들이 이미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서청아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태현아, 비서가 너무 귀찮네. 눈치도 없고.”
서청아가 불평하자 윤태현은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내가 분명히 말했지. 두 시간 뒤로 미뤄. 어떤 일이든 청아보다 중요한 건 없어.”
강유진은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해졌다. 숨을 들이마셔도 폐까지 공기가 들어오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강유진은 더 말하지 않았다. 문을 조용히 닫고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
업계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윤태현은 일 중독자였다. 사적인 일이 아무리 바빠도 심지어 수술을 막 끝낸 날에도 윤태현은 몸을 이끌고 업무부터 정리했다.
그런 윤태현이 서청아가 몇 마디 애교를 부렸다는 이유로 협력사들을 자극할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중요한 회의를 두 시간이나 미루다니.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태현 씨는 서청아를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걸까.’
강유진은 시든 눈으로 바닥을 한번 내려다본 뒤, 감정을 억지로 추슬렀다. 그리고 회의실로 들어가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윤성 그룹의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그 자리에 모인 대표들도 윤태현을 대놓고 입에 올리지는 못했다. 대신 화살은 전부 강유진에게 돌아왔다.
강유진은 변명하지 못했다. 고개를 숙인 채 쏟아지는 질책을 그대로 받아 냈다.
두 시간이 그렇게 지나갔다. 윤태현이 그제야 회의실로 들어왔다.
회의가 끝난 뒤 강유진은 뻐근하게 저린 다리를 끌며 회의실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복도로 나오자마자 서청아가 강유진을 불렀다.
“네가 강유진이야? 태현이 말로는 네가 커피 잘 탄다고 하더라. 사무실 사람들도 좀 지친 것 같은데, 다 한 잔씩 준비해 줘. 내 건 얼음 넣고, 설탕은 빼고...”
서청아가 윤태현의 총애를 등에 업고 있다는 걸 강유진도 모를 리 없었다. 강유진은 거절하지 못하고 탕비실로 향했다.
강유진은 두 시간을 꼬박 붙잡혀 400잔이 넘는 커피를 내렸다. 한 잔 한 잔 준비해 들고 나올 때쯤 강유진의 손끝은 감각이 무뎌져 있었다.
그런데 첫 모금을 마시자마자 얼굴빛이 변한 서청아는 아무 말도 없이 컵을 들어 그대로 던졌다.
단단한 머그잔이 강유진의 이마를 정통으로 맞혔다. 이마가 찢어지며 피가 터졌고, 상처는 보기 흉하게 벌어졌다.
강유진은 신음도 제대로 못 하고 얼굴을 찡그린 채 상처를 움켜쥐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서청아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서청아는 옆에 놓인 커피 잔들을 집어 들고, 한 잔 한 잔 강유진에게 집어던졌다.
강유진의 몸 곳곳이 멍들어 시퍼렇게 변했고, 산산이 깨진 도자기 파편이 피부를 긁으며 군데군데 피가 흘렀다. 갈색 커피가 강유진의 온몸을 흥건히 적셨고, 붉은 피가 섞여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강유진은 너무 아팠지만 몸을 웅크린 채 머리와 가슴만은 지키려고 팔로 감쌌다.
사무실 안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했다. 누구도 나서서 말리지 못했고 모두가 멀찍이 떨어져 서청아가 화를 풀 때까지 지켜보기만 했다.
그 소란이 결국 윤태현을 끌어냈다.
윤태현은 난장판이 된 바닥과 피투성이로 쓰러진 강유진을 보고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
“무슨 일이야?”
윤태현을 보자 서청아는 곧바로 눈가를 붉히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태현아, 내가 유진 씨한테 커피 한 잔 부탁했거든? 내가 생리 중인데 강유진이 얼음 넣어서 줬어. 지금 배가 너무 아파.”
서청아의 눈가가 빨갛게 젖은 걸 보자 윤태현은 얼굴이 순식간에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강유진, 4년이나 내 옆에서 일했으면서 이것도 제대로 못 해? 아니면 청아한테 불만 있어서 일부러 그런 거야?”
강유진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강유진은 설명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윤태현은 강유진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고 곧바로 최 비서를 불렀다.
“강유진을 회사 규정 위반으로 처리해. 이번 달 월급이랑 분기 성과급 전부 삭감하고, 전사 공지로 공개 처리해. 다음 주 전사 회의에서 경위 설명하고 반성문도 제출해.”
윤태현은 그렇게 말하자마자 겉옷을 벗어 서청아의 어깨에 둘러 줬다. 그리고 서청아를 품에 안아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