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외국어 선생님은 연국 사람으로 외모가 반듯하고 준수했다. 정유나는 그가 자신의 마음속 가장 완벽한 백마 탄 왕자님이며 첫사랑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서하영과 정유나는 자리를 찾아 앉은 뒤 책과 펜을 꺼내 수업에 집중했다.
수업이 끝나자 정유나는 질문을 핑계로 그녀의 ‘첫사랑’에게 다가갔고 서하영은 자리에 앉아 그녀를 기다렸다.
10분이 지나도 정유나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서하영은 화장실로 가기 위해 일어섰다.
화장실에서 나와 교실로 돌아가려던 순간 주민정이 몇 명의 여자들과 함께 다가왔다.
주민정은 어두운 표정으로 서하영의 얼굴을 노려보며 그녀가 가까이 오자 길을 막고 명령조로 경고했다.
“앞으로 지선우랑 거리 둬!”
서하영은 차분히 말했다.
“네가 직접 지선우한테 말해.”
주민정이 얼굴을 확 구겼다.
“기어오르는 거야?”
오만하기 그지없었고 며칠 전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기에 이때다 싶어 바로 손을 들고 서하영의 얼굴을 때리려 했다. 마치 모두가 보는 앞에서 서하영을 때리면 지선우의 체면이 서는 듯이.
서하영은 그녀의 손이 자신에게 닿기 전에 발을 들어 주민정의 왼쪽 다리를 차버렸고 주민정은 그대로 다리가 부러졌다.
서하영의 깨끗하고 정교한 얼굴은 사람들에게 그녀가 나약하고 만만하다는 착각을 심어주었다. 사실 그녀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도 생긴 것과 마찬가지로 깔끔한데 말이다. 쓸데없는 말이라곤 하는 법이 없었다.
...
한 시간 후 서하영은 교장실에 서 있었다. 주민정은 이미 병원으로 옮겨졌고 현재 교장과 크게 다투고 있는 사람은 주민정의 아버지 주건형이었다.
지도교사는 서하영을 감싸며 주건형에게 따지고 들었다. 분명 주민정이 먼저 손을 댔고 서하영의 반격은 정당방위였다.
주건형은 화를 내며 그에게 삿대질했다.
“이 망할 것을 왜 그렇게 감싸주는 거죠? 민정이 남자 친구를 꼬드긴 걸 봐선 그렇게 좋은 애가 아닌데, 그쪽이랑도 그렇고 그런 사이인가?”
이 말에 지도교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함부로 모함하지 마세요!”
교장도 얼굴을 찌푸렸다.
“주 대표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명예훼손과 모욕은 고소할 수도 있습니다!”
주건형은 더욱 화를 냈다.
“둘이 무슨 사이든 상관없고 민정이 일에 대해 해명이나 해요. 이 물건 내보내지 않을 거면 내가 학교에 기부한 20억 지금 당장 돌려줘요.”
주씨 가문은 돈이 많아 지난해 강진 대학에서 새로 도서관을 지을 때 주건형이 20억을 기부했다.
“나는 강진 대학에 기여한 사람인데 당신들이 가난한 학생 하나 때문에 나를 이렇게 대한다면 당장 그 돈 돌려줘요!”
주건형은 허리를 펴고 당당하게 서 있었다.
“그럼 며칠만 시간을 더 주시죠.”
학교는 당장 20억을 마련할 수 없었지만 교장은 배운 사람이라 그래도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려 했다.
“협상은 없어요. 당장 돈 돌려줘요!”
주건형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 돈 내가 드리죠.”
소파 뒤에서 차가우면서도 매력적인 목소리가 들려왔고 곧바로 꼿꼿한 자세의 남자가 일어나 긴 다리를 뻗으며 걸어왔다.
주건형의 기름진 얼굴이 굳어지며 남자를 보고 넋이 나갔다.
“임, 임 대표님?”
뒤에 서 있던 서하영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그들이 다투는 동안 소파 쪽에 내내 한 사람이 앉아 있었지만 상대가 모두에게 등을 돌리고 있어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줄곧 차분함을 유지하던 서하영도 조금 마음이 불안해졌다. 여기서, 그것도 이런 상황에서 임도윤을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특히 주건형이 조금 전 큰 소리로 말한 것들도 분명 그의 귀에 들어갔을 거다.
주건형은 금세 기세가 꺾였다. 근래 사업이 잘돼서 몸값이 수천억으로 뛰긴 했어도 임씨 가문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교장 방수철이 앞으로 나서며 차분히 말했다.
“이건 학교와 학부모 사이 일이니 도윤이 너는 끼어들지 마.”
임도윤의 아버지와 사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그는 개교기념일 때문에 임도윤을 초대했기에 이런 일로 그를 귀찮게 할 수 없었다.
주건형은 교장과 임도윤이 친분이 있다는 걸 몰랐던 터라 즉시 웃는 얼굴로 아첨하며 말했다.
“임 대표님이 여기 계신 줄 몰랐습니다. 돈은 갚지 않아도 됩니다. 농담이었습니다.”
임도윤은 그를 무시한 채 전화기를 꺼내 회사 비서에게 학교에 40억을 송금하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은 뒤 방수철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자까지 다 돌려주세요.”
주건형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막 귀국한 임도윤에게 잘 보이기도 전에 밉보이고 말았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방수철도 더 말하지 않았다. 곧 들어온 돈은 주건형에게 다시 송금되었다.
주건형은 멋쩍게 떠나며 임도윤에게 잘 보일 방법만 고민했다.
교장과 지도교사가 함께 주건형을 배웅하러 나가고 사무실에는 서하영과 임도윤만 남았다.
서하영은 뭐라도 말해야겠다는 생각에 남자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려는데 임도윤이 먼저 말했다.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그쪽을 위해서 그런 것도 아니니까!”
서하영은 숨이 목구멍에 턱 막혀 내쉬지도 들이쉬지도 못했다. 일찌감치 남자의 독설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슴이 답답했다.
그녀는 차분히 말했다.
“안 고마워요.”
남자는 서하영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주민정을 발로 차는 걸 보니 싸움 좀 하는 것 같던데요?”
복도 카메라 영상은 임도윤도 봤다. 당시 주민정은 압도적인 기세로 빠르고 매섭게 손을 날렸지만 서하영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대로 주민정의 다리를 차버렸다.
평범한 여자가 발차기 한 방에 골절까지 시킬 수 있나.
서하영의 눈동자에 어두운 빛이 스치며 차분히 말했다.
“어릴 때 호신술 좀 배웠어요.”
임도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난 공과 사는 구분하니까 이 일 때문에 해고하진 않아요.”
서하영이 말을 하려던 순간 발걸음 소리가 들려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임도윤은 얌전한 척 구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웃음이 나려고 했다.
방수철이 들어와 서하영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하영아, 네가 착한 학생인 건 알아. 하지만 무슨 상황이든 손을 써서는 안 돼. 네 손으로 앞날을 망치진 마.”
서하영은 긴 속눈썹을 드리운 채 순종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사합니다. 교장선생님.”
“나한테 고마워할 것 없어.”
방수철이 점잖게 웃었다.
“네가 감사해야 할 사람은 임 대표지. 임 대표가 널 도와줬으니까.”
서하영은 남몰래 깊게 숨을 들이쉬고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가 고개를 든 뒤 분홍빛 입술을 살짝 열며 말했다.
“임 대표님, 감사합니다.”
임도윤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지만 검은 눈동자 속에 조롱의 빛이 어른거렸다. 조금 전까지 고맙지 않다고 말한 그녀를 조롱하는 듯했다.
“감사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임도윤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학생으로서 조용히 지내는 게 나을 거예요. 이런 쓸데없는 일로 백 년 전통의 명문대 강진 대학의 명성을 더럽히지 마요.”
서하영은 얼굴이 창백해지며 입술을 깨물고 말하지 않았다.
방수철은 분위기를 풀기 위해 말을 돌렸다.
“정말 미안해. 괜히 돈 40억을 쓰게 했네. 이 돈은 학교에서 갚을게.”
임도윤이 서하영을 슬쩍 돌아보았다.
“이 학생에게 갚으라고 하세요.”
서하영은 숨을 삼키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방수철은 임도윤이 농담하는 줄 알고 서하영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날이 곧 어두워지는데 하영이 너도 집에 가. 주민정 일은 학교에서 처리할 테니 신경 쓰지 말고.”
서하영은 다시 한번 방수철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뒤 차마 임도윤을 보지 못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서하영이 나가자 방수철은 다시 임도윤에게 자리를 권하며 웃었다.
“겁주지 마. 아직 어린애한테!”
임도윤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전혀 안 무서워하는 것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