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그 순간 전각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북양 황실 사람들 중에 주호림이 방청옥을 마음에 품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설령 그 일을 모르는 문무 대신들이 있다고 해도 조금 전 주호림이 잠깐 흥분을 억누르지 못한 모습과 방청옥에게 관심을 보이는 모습을 통해 그가 방청옥을 연모한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현재 방청옥은 태자비가 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후보였다.
그런데 남양 최고의 재인이라고 자칭하는 사내가 갑자기 튀어나와 공공연히 북양의 재녀를 빼앗으려고 하니 이 얼마나 거만하고 안하무인격인 태도인가?
성격이 불같은 이황자 주성훈이 탁자를 내리치며 말했다.
“방청옥은 우리 북양 최고의 재녀이기 때문에 혼인을 한다면 우리 북양의 훌륭한 사내와 혼인할 것이오. 당신 같은 남양 오랑캐는 방청옥과 혼인할 자격이 없소! 그러니 꿈 깨시오!”
남양 오랑캐라는 말에 남양 사람들이 분노했다.
건장한 체구의 한 사내가 분노에 찬 고함을 질렀다.
“지금 남양 오랑캐라고 했습니까? 변방에서 고작 몇 년 지냈다고 하여 감히 우리 남양을 모욕하려고 하다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군요. 전 당신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 말을 한 사람은 남양 황제의 여덟째 아들 평서왕이었다. 평서왕은 남양의 서쪽 변방을 지키는 자였는데 서쪽 변방에서 자주 전투를 치러 명성이 높고 성격도 매우 호전적이었다.
“이렇게 흥분하여 날뛰는 걸 보면 오랑캐가 확실한 것 같군요.”
주성훈이 차갑게 웃었다.
“무례하군요!”
양해승이 분노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옆에 있던 사람이 호통을 치며 그를 막았다.
“아우야, 다른 사람의 말 몇 마디에 그리 흥분하면 되겠느냐? 너는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더 배워야겠구나.”
“네... 형님.”
주석호는 턱을 매만지며 상황을 지켜봤다.
양해승을 말린 사람은 남양 황제의 일곱째 아들 양만수였다. 이번에 남양 사람들을 이끌고 온 사람이 바로 양만수였다.
이번에 남양에서는 황자 두 명과 공주 두 명, 그리고 재인 남하택과 사신, 호위 여럿이 함께 북양을 방문했다.
북양과 달리 남양 황제는 이미 노쇠하여 현재 대부분의 정사를 태자가 처리하고 있었기에 누가 황제가 될지는 뻔했다. 그리고 다른 황자들은 이미 왕이 되었거나 영토를 하사받아서 황위를 두고 쟁탈전이 벌어질 일이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두 황자가 사람들을 이끌고 북양의 도성에 방문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석호는 그들이 먼 길을 달려 북양까지 온 이유가 단순히 정략혼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하.”
양만수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무황 폐하, 부디 저희의 무례를 양해해 주셨으면 하옵니다. 남 형은 오래전부터 방 낭자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는데 오늘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되니 기뻐서 그런 것일 뿐이옵니다. 저희는 오늘 두 나라의 화친을 위해 이 자리에 모인 것이니 혼사를 강요할 수는 없는 법이지요. 이 자리에 있는 여인과 사내들은 응당 서로 어울려 자유로이 교류해야 하며 당사자들이 서로 뜻만 맞는다면 저희 중 그 누구도 그들을 막을 자격은 없지요. 그렇지 않사옵니까?”
“그렇소.”
무황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혼인이라는 것은 당연히 본인들의 의지가 가장 중요한 법. 방 정승, 정승의 딸이 누구를 선택하든 짐은 절대 간섭하지 않을 테니 정승의 딸에게 자유롭게 선택하라고 하시오.”
“황공하옵니다, 폐하!”
방현석이 예를 갖추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딸을 남양으로 시집보내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딸을 호랑이굴로 밀어 넣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남하택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는 부채를 펴면서 의기양양하게 웃어 보였다.
“그냥 고른다면 재미도 없거니와 방 낭자도 자신이 고른 이가 진정 어질고 선한 이인지 알 수 없을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남 형은 어떤 방식으로 골라야 한다고 생각하시오?”
주호림이 평온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당연히 겨뤄야지요!”
남하택은 정색하며 말했다.
“문과 무, 총 두 번을 겨루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되옵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여인과 사내들이 자신의 재주를 선보이는 것이지요. 그리고 승리한 자가 가장 먼저 마음에 드는 이를 선택할 수 있고 선택받은 자는 거절하면 아니 되옵니다.”
그 말을 듣고 주호림은 미간을 찌푸렸다.
남하택의 의도는 너무도 뻔했다.
방청옥 본인이 선택하게 한다면 주호림은 방청옥이 앞으로 황제가 될 자신을 선택할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문무를 겨룬다면 문식에서는 그가 남하택을 이길 수 없을지도 몰랐다. 남하택이 남양 최고의 재인이라 자부한 걸 보면 실력이 상당히 뛰어날 것이니 말이다.
남하택은 시문에 굉장히 능통했다.
그리고 무력에서도 주호림이 이기는 건 불가능했다.
비록 태자라서 기본적인 것들은 배웠으나 둘째 아우와 평서왕이 이 자리에 있는 한 우승을 거머쥘 수는 없었다.
남하택은 주호림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꿰뚫고 있었기에 주호림이 거절하기도 전에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태자 전하, 예로부터 재인과 미인이 이어지는 것은 운명이라 하였사옵니다. 설마 제게 질까 봐 두려우신 것이옵니까?”
남하택은 부채를 흔들며 가볍게 웃었다.
“제가 무력에서는 조금 약하지만 문식에서는 한 보 양보할 테니 북양 사람들 모두 함께 저와 겨루셔도 되옵니다. 만약 제가 진다면 패배를 인정하고 앞으로 다시는 글을 짓지 않겠사옵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들이 진다면 연화가 끝난 뒤 방 낭자께서는 저와 함께 남양으로 가서 혼인을 치르시지요.”
아주 거만한 태도였다.
화가 난 주호림은 이마에 핏발이 섰다.
다른 황자들 또한 화를 참았다. 사신을 죽인다면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게 되기 때문에 당장 남하택을 죽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과 달리 주석호는 매우 덤덤하게 유유히 다과를 먹었다.
다과는 굉장히 부드럽고 달아서 맛있었다.
“흥, 쓸모없는 놈. 할 줄 아는 게 먹는 것밖에 없는 것이냐?”
주평진이 주석호를 욕했다.
주석호는 웃음을 터뜨렸다.
“다섯째 형님은 저처럼 쓸모없는 놈이 아니니 재능이 있을 텐데 저자와 겨뤄보는 건 어떻습니까?”
“나는...”
주평진은 순간 말문이 막히며 얼굴이 벌게졌다.
만약 그에게 그런 실력이 있었다면 황제에게 냉대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대전 중앙.
화가 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을 본 남하택은 거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왜 다들 조용하십니까?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저와 겨뤄보실 분이 없으십니까?”
“망발은 삼가시지요!”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바로 다름 아닌 방청옥이었다. 그녀는 차가운 얼굴로 덤덤히 입을 열었다.
“저를 눈여겨봐 주신 것은 감사드립니다만 제 혼사는 제가 직접 정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와 나이가 엇비슷하지만 문식에 있어서 저보다 훨씬 더 뛰어나신 분이어야 저도 기꺼이 혼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방청옥은 자부심이 있었고 자신의 재능과 학식에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그런 일이 있고 나니 눈앞의 남하택과도, 태자와도 혼인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순결을 빼앗은 무뢰한과 혼인하는 것은 더 불가능했다.
그를 죽인 뒤 죄를 짊어지고 죽거나 그 누구와도 혼인하지 않고 홀로 사는 것이 악명이 자자한 무능한 황자와 함께 사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그러나 주호림은 오히려 화색을 드러냈다.
그는 방청옥이 남하택을 거절하려고 일부러 그런 말을 했다고 여겼다.
젊은이들중에 북양 최고의 재녀 방청옥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을 테니 말이다.
“좋습니다!”
남하택은 매우 기뻐하면서 부채를 거두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방 낭자의 말대로 하겠습니다! 제가 한 보 양보해드릴 테니 낭자께서 출제하시지요.”
방청옥의 표정에서 약간의 노여움이 드러났다.
남하택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그가 방청옥을 깔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무뢰한만큼이나 역겹구나!’
“이제 곧 있으면 추석이니 그것을 주제로 시를 짓도록 하지요. 제가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방청옥은 잠시 정신을 가다듬은 뒤 입을 뗐다.
“달빛 아래 오동나무의 그림자, 시간 따라 움직이네. 모두가 모여드는 이 밤, 나그네는 홀로 텅 빈 마당에 앉아 있네. 월궁의 항아에게도 서글픔이 있는 법. 그 곁을 지키는 것은 오직 월궁과 계수나무뿐이네.”
짧은 시였지만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추석날, 쓸쓸하게 홀로 있는 사람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아마 월궁의 항아 또한 그 사람과 비슷하게 서글픔을 느꼈을 것이다.
항아의 곁을 지키는 것은 오직 월궁과 계수나무뿐이니 말이다.
시 속에 담긴 정취는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워 북양 황실의 사람들 모두 감탄했다.
주호림 또한 흐뭇한 얼굴로 방청옥을 바라보았다. 역시 방청옥은 태자비가 되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남하택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글이 화려한 걸 보니 북양의 재녀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군요. 하나 그릇이 작아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