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유재윤은 공주희를 데리고 집밥만 하는 식당에서 식사한 뒤 공주희가 노트북이 고장 났다며 새로 사야 한다고 졸라 오후 내내 쇼핑을 했다.
결국 200만 원이 훌쩍 넘는 노트북을 골랐고 계산은 당연히 유재윤이 했다. 맛있는 것도 얻어먹고 새 노트북까지 얻은 공주희는 신이 나서 돌아오는 길 내내 폴짝폴짝 뛰었다.
두 사람이 블루나잇에 도착하자 직원들이 알아보고 바로 VIP 전용석으로 안내했다.
유재윤은 두 동생을 데려왔으니 귀가도 안전하게 해줘야 한다는 생각에 술은 마시지 않고 음료수만 주문했다.
공주희는 칵테일 한 잔을 주문했고 유재윤이 음료수만 마시는 걸 보고는 자신과 지예빈을 집까지 태워줄 걸 알았기에 마음 놓고 마셨다.
여하간에 내일 수업도 없으니 이따가 지예빈과 함께 내려 지예빈의 집에서 같이 자면 된다고 생각했다.
직원이 음료와 칵테일을 가져다주자 지예빈이 도착했다.
공주희는 반갑게 뛰어가 지예빈의 팔에 팔짱을 꼈다.
“예빈! 왜 이렇게 빨리 왔어? 안 그래도 막 전화하려던 참이었는데.”
“원래 촬영장 가기로 했는데 여주인공을 맡은 배우가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해서 못 갔어. 그래서 퇴근하자마자 바로 왔지.”
“예빈이 왔어? 뭐 마실래?”
“오빠, 나도 주희랑 같은 거로 주면 돼요.”
지예빈이 자리에 앉으며 대답하자 유재윤은 직원을 불러 같은 칵테일을 시켰다.
공주희와 지예빈은 또래라서 대화가 끊기지 않았고 지예빈인 매일 연예계 스타들과 함께 일하니 여러 소문도 많이 알고 있었다.
공주희는 지예빈을 통해 연예계가 얼마나 복잡한 곳인지 알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겉으로는 친절하지만 뒤에서는 갑질에 성격도 고약하고 주변 사람들을 무시한다는 것도 말이다.
게다가 강은성과 엮여서 스캔들이 터지면 난리가 났다. 그래서 공주희는 이미 몇 번이나 탈덕하게 되었고 이제는 그냥 스캔들만 즐길 뿐 더는 누구의 팬도 아니었다.
“여주인공이 누군데?”
공주희가 무심코 물었다.
“누구겠어. 당연히 요즘 제일 핫한 엘라지. 성격 장난 아니게 까다롭더라. 평소엔 그렇게 온순해 보이더니.”
지예빈은 작게 말해주었다.
“어제 은성 오빠랑 기사 난 신인 여배우? 쯧쯧, 은성 오빠도 진짜 대단하다니까.”
공주희는 거침없이 말했다.
두 사람은 고개를 맞대고 대화를 이어갔고 공주희는 지예빈이 늘어놓는 연예계 뒷이야기를 열심히 들었다.
이때 지예빈이 갑자기 자기 친오빠 얘기를 꺼냈다.
“우리 오빠 도우럽 간 지 거의 일주일 됐는데. 연락은 했어?”
“내... 내가 왜... 왜 세원 오빠랑 연락해야 하는데.”
지예빈이 갑자기 지세원을 언급하자 공주희는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었다.
“우리 오빠 포기하기로 한 거야?”
지예빈은 성격이 솔직하고 직설적이었던지라 공주희가 자신의 오빠를 좋아한다면 당연히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제일 친한 친구가 자신의 가족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시누이 갈등도 없을 테니까. 게다가 자신의 엄마도 공주희를 좋아해서 고부 갈등도 없을 것이었다.
“쉿, 작게 말해!”
자신의 비밀을 크게 말해버리자 공주희는 다급하게 지예빈의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히 유재윤이 음료를 마시며 두 사람 쪽을 보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했다.
자신이 지세원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오로지 지예빈만 알고 있었다. 그것도 예전에 단둘이 지예빈의 아파트에서 술을 마시다가 술김에 그만 속마음을 털어놓고 만 것이다.
그 후로 공주희는 절대 티를 내지 않았다. 남들 앞에서는 다른 오빠들과 똑같이 대하며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한편 유재윤은 음료를 들고 두리번거리다가 바텐더 앞에 앉은 여자가 공지한의 첫사랑과 닮았다는 걸 발견하고 자세히 보려고 했지만 어느새 사라져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이내 고개를 돌려 수군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너희 둘 뭐야? 뭘 그렇게 속닥여? 춤추러 안 갈래?”
“오빠, 우리 오빠는 언제 돌아와요?”
지예빈은 공주희 대신 궁금한 걸 물었다.
“네 친오빠인데 내가 몰라?”
“우리 오빠가 나한테 말해줄 사람이 아니잖아요. 우리 부모님도 모를걸요.”
지예빈은 사실대로 말했다. 여하간에 지세원은 늘 바빴던지라 자취하고 있었고 집에 갈 때만 연락하곤 했다. 어릴 때부터 독립적이어서 부모님 걱정을 끼친 적도 없었고 부모님도 이미 익숙해졌다.
“나도 확실히는 몰라. 어제 지한이 형이랑 회의하긴 했는데 문제는 거의 다 정리됐대. 아마 셋이 비슷하게 돌아올 것 같아.”
오빠들이 곧 돌아온다는 말에 공주희는 괜히 기분이 좋았다.
“지한이 형이 돌아오면 아마 형수님도 돌아올 거야. 그때 지한이 형 집에 가서 밥 얻어먹자.”
유재윤은 삼시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는 스타일이었다.
두 먹보는 기대되는 듯했지만 약속이라도 한 듯이 공지한이 없을 때 가자고 말했다. 공지한의 쌀쌀맞은 태도만 보아도 밥 얻어먹으러 간 걸 알게 되는 순간 두 사람을 얼려버릴지도 몰랐으니까.
세 사람이 즐겁게 얘기를 하고 있는데 한 여자가 끼어들었다.
“재윤 씨, 정말 재윤 씨였네요. 아까 저쪽에서 봤을 때 확실하지 않아서 와봤는데 진짜였네요. 이 두 분은 주희 씨랑 예빈 씨죠? 벌써 이렇게 클 줄이야. 곧 졸업이죠?”
윤하영은 친근한 척 그들에게 인사를 했는데 말투는 꼭 그들보다 한참 나이 많은 어른 같았다. 공주희와 지예빈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기만 해도 속이 메스꺼웠지만 유재윤이 대꾸하지 않으니 두 사람도 말하지 않았다.
유재윤은 고개를 들어 술잔을 들고 서 있는 윤하영을 보고서는 조금 전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윤하영은 아무도 자신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음에도 뻔뻔하게 물었다.
“여기 앉아도 될까요?”
“물론이죠.”
유재윤은 아직 공지한이 윤하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랐고 아파트까지 마련해주며 챙겨주는 상황이라 아예 무시하기도 어려웠다.
공주희와 지예빈은 유재윤이 앉는 걸 허락했으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예전에 딱 한 번 윤하영을 보았을 뿐 잘 알지도 못했다. 그저 공지한의 프러포즈에 나타나지 않다가 결혼하고 나서야 갑자기 나타난 걸 보니 그다지 좋은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원래부터 친하지 않았던지라 속으로도 이미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굳이 반갑게 대하지 않고 아까부터 하던 얘기를 이어갔다.
윤하영은 자신보다 어린 두 사람이 고개를 숙여 자기들끼리만 얘기하는 걸 보았지만 끼어들지 못했다. 대신 고개를 돌려 유재윤과 잡담하며 슬쩍 공지한의 소식을 캐내려고 했다.
공지한은 최근 자신이 보낸 문자에도 답장하지 않았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 그래서 며칠째 일부러 친구들이 자주 나타난다는 술집에 와서 혹시나 그들을 마주칠 수 있지 않을까 하며 기다렸는데 오늘 드디어 유재윤을 만난 것이다.
유재윤은 그들 중에서도 말이 잘 통하는 편이었다.
그녀는 이 술집이 지세원의 소유이며 그들만을 위한 전용 VIP 자리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술집 장사가 아무리 잘 돼도 그들의 전용 자리는 절대 다른 사람에게 안내되지 않았고 오직 그들만 사용할 수 있었다.
이것은 이 술집의 명물처럼 되어 혹시나 그들을 볼 수 있진 않을까 생각하며 오는 손님도 꽤 많았다. 여하간에 다섯 명의 미모는 강진에서 따라올 자가 없었고 공지한은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싱글이었다.
공지한은 비록 결혼하긴 했지만 결혼식은 하지 않아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얼마 전에 윤하영과 기사가 나 금방 삭제되긴 했지만 대중들은 그것을 오히려 증거라고 여겼다.
그래서 젊은 여자들은 그저 멀리서라도 직접 한 번 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자신만의 달콤한 상상을 하곤 했다.
윤하영은 얼마 전에 알게 된 친구 몇 명과 함께 왔다. 그런데 VIP 자리에 앉고 마치 예전부터 친한 사이인 듯 보이자 사람들은 당연히 공지한이 윤하영에게 미련이 남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후의 대화 속에는 은근한 아부가 섞여 있었고 모두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
윤하영은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떠받들어지는 이 기분을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