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송하린은 조용히 몸을 돌려 그 둘의 모습을 피했다. 그리고 천천히 학교 뒤편의 정원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오래된 벵갈 고무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두꺼운 나무줄기에는 오래전 새겨진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송하린 민재하]
그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그날, 민재하는 송하린의 손을 잡고 나무 앞에 섰다.
그리고 작은 칼을 꺼내 한 획 한 획 또박또박 이름을 새기며 말했다.
“우리 이름을 이렇게 새겨두면 영원한 사랑이 이루어진대.”
그때 그 말은 정말로 영원한 약속처럼 들렸다.
송하린은 조용히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들었다.
그녀는 날이 닳아 무뎌진 열쇠 끝으로 나무에 새겨진 낡은 글자를 천천히 긁기 시작했다.
이름이 완전히 사라져 떠나려는 순간, 등 뒤에서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하야, 여기 봐! 나 들었는데 이 나무에 이름 새기면 둘 다 대박 난대! 우리도 새기자, 응?”
송하린은 뒤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민재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고 있을 거라는 걸.
역시나, 잠시 후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이윽고 나무껍질을 깎아내는 미세한 소리도 들려왔다.
그 소리는 그녀가 방금 자신의 이름을 지워낸 바로 그 나무 옆에서 났다.
그들은 나란히 서서 새로 고른 나무에 ‘민재하’와 ‘오유나’라는 이름을 함께 새겼다.
송하린은 열쇠를 주머니에 넣고 뒤돌아보지 않은 채 그곳을 떠났다.
...
정원 끝에 다다랐을 때, 인공 호수의 수면이 부드럽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린아, 잠깐!”
오유나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머리핀 하나가 들려 있었다.
“이거, 네가 떨어뜨렸어.”
송하린은 그게 자신이 방금 실수로 떨어뜨린 것임을 알아봤다.
“이리 줘.”
하지만 오유나는 손을 살짝 뒤로 빼며 입꼬리를 올렸다.
“하린아, 앞으로 재하 옆에 설 사람은 나야. 넌 이제 그 자격 없어. 내가 재하 마음속에서 너보다 천 배 만 배는 더 소중하다는 걸 증명해 보일게.”
송하린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말 다 했으면 그거 줘.”
그녀의 담담한 태도는 오유나를 오히려 더욱 자극했다.
“뭐야, 너 아직도 잘난 척이야?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다고 뭐 대단한 줄 알아? 세상에 소꿉친구가 운명일 수 있다고 생각해? 나는 하늘이 내려준 사람이고 너는 그 사람 인생에 잠깐 스쳐 간 엑스트라일 뿐이야!”
“이 손, 놓아.”
송하린은 손목이 아파 몸을 틀었다.
“안 놔!”
순간, 두 사람의 몸이 부딪히며 호숫가 난간 가까이로 밀렸다.
짧은 실랑이 끝에 두 사람은 동시에 물속에 빠져 버렸다.
철퍼덕!
물보라가 터지며 잔잔하던 수면이 크게 일렁였다.
송하린은 수영할 줄 알았다.
하지만 차가운 호수 물이 한순간에 온몸을 덮치자 다리에 쥐가 나며 몸이 굳어버렸다.
꼬르르륵.
숨이 막혔다.
차가운 물이 코와 입으로 밀려들었고 온몸이 아래로 무겁게 끌려갔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고 눈앞이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지만 의식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때 수면 위에서 ‘풍덩’ 하는 소리가 들렸다.
민재하가 물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순간 송하린의 마음속에서 꺼져가던 희미한 불빛이 다시 반짝였다.
‘그래도... 아직...’
그러나 그 불빛은 차가운 물 속에 완전히 삼켜졌다.
민재하는 그녀에게 오지 않고 오유나 쪽으로 헤엄쳤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온 힘을 다해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송하린을 돌아보지 않았다.
민재하는 오유나를 간신히 끌고 호숫가로 올라왔다.
그녀는 물에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일부러 크게 기침했다.
“재하야, 하린이... 하린이가 아직 물속에 있어!”
그제야 민재하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 끝에서, 물속에서 힘겹게 떠오르려 애쓰는 송하린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끝난 사이야. 그러니까 죽든 살든 나랑은 상관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