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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이소은은 비자 센터에 혼자 다녀와 모든 절차를 차분히 마무리했다. 그 이후로는 병원에 다시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곧 떠나기 전까지 처리해야 할 자잘한 일들이 생각보다 많았고 그녀는 목록을 하나씩 지워 나가듯 남은 일들을 조용히 정리해 갔다. 그 사이에도 나도윤 쪽에서는 끊임없이 연락이 들어왔다. 가장 먼저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보모였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대표님께서 병원 음식을 잘 못 드세요. 혹시 식사 좀 해다 주실 수 있을까요?” 이소은은 예의 바르게 거절했다. “죄송해요. 제가 지금 좀 바빠서요.” 이번에는 경호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한참을 머뭇거리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대표님이 요즘 너무 예민하셔서요. 치료도 잘 안 받으시고 물건도 자꾸 부수십니다. 혹시 이소은 양이 와서 한 번만 말려주실 수 있을까요?” 이소은은 한 치의 감정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말린다고 들을 분이 아니에요. 수고 좀 해주세요.” 마지막으로 집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한숨이 섞인 목소리였다. “대표님께서 요즘 계속 기분이 안 좋으세요. 자꾸 이소은 양을 보고 싶다고 하십니다.” 이소은은 짧게 대답했다. “알겠어요.” 그리고 그녀는 더는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은 채 전화를 끊었고 끝내 단 한 번도 병원에 가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출국일이 다가오자 이소은은 마지막으로 여권과 비자, 항공권을 차분히 확인한 뒤 작고 외로운 캐리어 하나를 손에 들고 현관으로 향했다.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고 화면 위에 떠오른 이름이 나도윤이라는 걸 확인한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조용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로 아직 병색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듯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소은.”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조심스럽게 단어를 골라 말을 이었다. “네가 요즘 병원에 안 오는 거... 지난번 스키장에서 있었던 일, 그리고 내가 불 속으로 뛰어든 일 때문에 화가 나서 그러는 거지?” 모든 걸 이미 이해하고 있다는 듯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큰 양보라도 해 주는 사람처럼 한층 부드러워진 어조로 말을 이었다. “됐어. 이제 그만 풀어. 나 오늘 퇴원해.”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기억을 더듬듯 덧붙였다. “예전에 네가 그렇게 가고 싶어 했던 프렌치 레스토랑 있잖아. 딱 4년 전에 개업했던 거기 오늘 내가 예약해 놓았어. 지금 데리러 갈게, 같이 저녁 먹자.” 그리고 목소리를 더 낮추며 마치 달래듯 말을 보탰다 “이소은, 나 원래 누굴 달래는 성격 아니야. 이제 그만 화 풀어, 응?” 이소은은 휴대폰을 손에 쥔 채, 텅 빈 거실 한가운데 서 있었다. 메아리라도 울릴 것처럼 고요한 공간 속에서 그녀는 문득 잠시 눈을 감았다. ‘그 레스토랑이라...’ 예전에 그녀가 자주 이야기하던 곳이었다. 새로 문을 열자마자 평이 워낙 좋아 예약조차 쉽지 않았고 그녀는 그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기대에 찬 얼굴로 그렇게 말했었다. “거기 꼭 가보고 싶어.” 하지만 그가 늘 하던 대답은 같았다. “그래, 나중에.” “요즘 바쁘니까 다음에 가자.” 그 ‘다음’은 또 다음으로, 그리고 다시 또 다음으로 미뤄졌다. 끝내 그녀가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게 되었을 무렵, 그 레스토랑은 더 이상 ‘신상 맛집’이 아닌 그저 오래된 유명 레스토랑이 되어 있었다. 그제야 이소은은 깨달았다. 그가 바빠서 가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녀와 함께 그곳에 갈 일이 그의 삶에서는 중요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런데 이제 와서, 하필이면 그녀가 떠나기로 결심한 바로 그날에 그는 시간이 난 모양이었다. “이소은? 듣고 있어?” 너무도 긴 침묵 끝에 그녀는 조용히 대답했다. “응, 듣고 있어.” “그럼 됐어. 내가 지금 데리러 갈게. 금방 도착할 테니까 기다려.” 뚝. 그는 여전히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휴대폰 화면이 어두워졌고 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이소은은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녀는 냉장고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여전히, 예전처럼 몇 장의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밥 꼭 챙겨 먹어.] [열쇠 놓고 가지 말고.] [오늘 회의 오후 3시.] 사소하지만 한때는 정성처럼 느껴졌던 메모들이었다. 이소은은 조용히 새 노란색 포스트잇 한 장을 꺼내 펜을 들었고 그 위에 단 두 줄을 또박또박 써 내려갔다. [우리 그만 헤어져. 도윤 씨, 이제 원하던 대로 한유라랑 행복하게 잘 살길 바라. 이소은] 국제공항 출국장. 이소은은 작은 캐리어 하나를 끌며 체크인을 마치고 보안 검색까지 끝낸 뒤 대기실로 들어왔다. 창가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던 그때, 휴대폰이 가볍게 진동했다. 나도윤에게서 온 문자였다. [소은아, 미안해. 한유라 쪽에 또 일이 생겨서... 내가 먼저 거기 좀 다녀와야 해. 식사는 다음에 다시 가자. 화내지 마. 내 연락 기다려.] 역시나였다. 이소은은 메시지를 바라보다가 무표정하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놀랍지도 않았고 아프지도 않았다. 그가 이 문자를 보낼 때의 표정이 눈에 선했다. 조금은 미안해 보이는 얼굴이었겠지만 그보다 더 큰 마음은 이미 또다시 그녀가 아닌 다른 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을 것이다. 이소은은 잠시 손가락을 멈췄다가 이내 움직여 단 세 글자만을 남겼다. [화 안 내.] 말대로 이제는 정말로 화낼 이유조차 없었다. 그들은 이미 더 이상 연인이 아니었고 그래서 그녀는 단호하게 나도윤의 전화번호와 카카오톡을 포함한 모든 연락 수단을 블랙리스트에 추가했다. 손놀림에는 망설임이 전혀 없었고 단 1초의 흔들림도 없이 모든 것을 끝냈다. 모든 정리를 마친 그녀는 휴대폰을 비행기 모드로 전환한 뒤 조용히 가방에 넣었다. 곧 탑승 안내 방송이 울렸고 이소은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의 흐름을 따라 탑승구로 향했다. 비행기 창밖으로 보이던 도시는 점점 작아지더니 이내 구름 아래로 완전히 가려졌다. 비행기는 하늘로 힘차게 솟구쳤고 창밖에는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순간, 나도윤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그녀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소은은 앞으로의 인생이 분명 지금보다 훨씬 더 빛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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