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Open the Webfic App to read more wonderful content

제4화

바로 어젯밤, 신유리는 심명준과의 지난 기억을 전부 떠올렸다. 그리고 이미 심명준을 내려놓았다고 믿었다. 그런데도 심장은 여전히 숨이 막힐 만큼 아팠다. 신유리는 몸을 웅크린 채, 심명준이 자신을 버리고 허지연에게 달려가던 장면을 떨칠 수 없었다. 그 장면이 한 번 떠오를 때마다 칼날이 살을 얇게 벗기듯, 마음을 조금씩 도려내는 것 같았다. 신유리는 한참을 울고 또 울었다. 눈물이 마를 때까지 울고 나서야, 심명준을 붙잡아 봐야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곁에 묶어 두면 결국 신유리만 비참해질 뿐이었다. 감정을 겨우 추슬러 고개를 돌리자, 병상 앞에 합의서 한 장이 조용히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짧은 메모가 있었다. [유리야, 심명준 서명 하나 받아내는 일쯤은 내가 나설 필요 없겠지?] 신유리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 사람이 이미 다녀간 것이다. 더 생각할 틈도 없이, 다음 순간 병실 문이 열리자 심명준이 들어왔다. “유리야.” 수척해진 신유리를 본 심명준은 복잡한 표정으로 신체검사 의뢰서 한 장을 내밀었다. “오후에 이 검사부터 해.” 신유리의 시선이 검사표를 스쳤다. 생식 기능, 전염병 선별 검사 같은 문구가 박혀 있었다. 신유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손에 쥔 이혼 합의서를 더 세게 움켜쥐고,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심명준, 나한테 이런 검사를 받으라고? 지금 날 의심하는 거야?” “난 당연히 널 믿어.” 심명준이 말끝을 눌러 삼켰다. “하지만 어제 연회장에서 너도 들었잖아. 사람들이 네가 사라졌던 3년을 두고 별별 말을 해. 네가 스스로 증명할 방법은 이거밖에 없어.” 그럴듯한 말이었다. 그런데 심명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신유리의 뺨을 세차게 후려치는 기분이었다. 심명준은 어젯밤 그 더러운 말들을 못 들은 게 아니었다. 들었으면서도, 사람들이 신유리를 마음껏 모욕하도록 내버려 뒀다. 신유리는 심명준을 살리려고 절벽 아래에서 악착같이 버텼고, 그 대가로 몸에 상처와 후유증을 남겼다. 그런데 심명준은 그 모든 걸 더러운 시간으로 몰아가려 했다. 신유리는 문득 예전 일이 떠올랐다. 항성 매체가 신유리에게 험한 말을 던지자, 심명준은 기자의 카메라를 사람들 앞에서 내리쳐 부쉈다. 그리고 신유리를 뒤로 감싸며 선언하듯 말했었다. “내 아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만큼 잘 아는 사람 없어.” 그런데 지금은 신유리를 가장 먼저 의심하고 깎아내리는 사람이 심명준 자신이었다. 신유리는 심명준을 똑바로 바라보며 비웃듯 말했다. “난 누구에게도 증명할 필요 없어. 너한테는 더더욱 그래. 너는 그럴 자격도 없어.” 신유리는 이혼 합의서를 내밀었다.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여기에 사인해. 그럼 서로 갈 길 가는 거야.” “신유리!” 심명준은 신유리가 든 서류를 제대로 보지도 않은 채,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말을 끊었다. “이제야 본색 드러냈네? 더는 못 버티겠지? 조건 걸려고 돌아온 거야? 이게 재산분할 합의서야, 아니면 지분 양도서야? 이렇게 빙빙 돌린 게 결국 이거 때문이야?” 심명준은 말을 덧붙였다. “돈은 못 줄 것도 없어. 대신 내 말 잘 들어.” 그리고 곧바로 가장 치명적인 무기를 꺼냈다. “이명자 아줌마 기억하지? 네가 사라진 뒤로 아줌마는 울다가 두 눈이 멀었어. 아줌마 아들은 지금 우리 그룹 산하 해운 회사에서 일해. 방금 관리자로 승진했지.” 심명준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검사 안 받겠다고 고집 부리면, 내일 바로 아줌마 아들을 실직하게 만들 수도 있어. 그 가족이 항성에서 살아갈 수 없게 되는 건 순식간이야.” 신유리는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언젠가 심명준이 이런 협박을 신유리에게 할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오후 두 시에 의사를 보내줄 거야.” 심명준은 상처투성이가 된 신유리의 몸을 보면서도 태연했다.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 오후 두 시가 되자, 의사가 기구를 들고 약속대로 찾아왔다. 차가운 기구가 몸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신유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손톱이 손바닥을 깊게 파고들어 피가 배어 나오는데도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건 검사가 아니었다. 신유리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직접 주도한 신유리의 영혼과 존엄을 공개적으로 짓밟는 처형이자 모욕이었다. 검사가 끝난 뒤에야 심명준이 나타났다. 심명준은 블랙카드를 한 장 내밀었다. “검사도 끝났으니, 이제 다들 마음 편히 있겠지.” 심명준은 어딘가 느슨해진 말투로 말했다. “이 카드는 네가 가져. 놓친 신상 있으면 마음에 드는 걸로 네가 알아서 사.” 신유리는 속이 뒤집히는 구역질을 억지로 참으면서 다시 이혼 합의서를 내밀었다. “네가 하는 말이 전부 가식인 거 알아. 그래도 정말 나한테 보상하고 싶다면, 여기에 사인해.” 심명준은 신유리의 지나치게 평온한 얼굴을 보며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곧 스스로를 달랬다. ‘어차피 신유리가 노리는 건 지분이나 부동산 같은 것이겠지.’ 심명준이 서류를 받아 자세히 보려던 찰나, 허지연이 울먹이며 뛰어 들어왔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얼굴에는 선명한 붉은 긁힌 자국이 하나 나 있었다. 허지연은 구겨진 종이를 꼭 쥔 채 눈물을 쏟아냈다. “차고에서 누가 내 앞길을 막았어. 이 종이를 억지로 쥐여 주면서... 오빠 곁에서 안 떠나면, 내 얼굴을 그어 버리겠대!” 심명준은 반사적으로 서류를 덮어 버리고 허지연에게 달려갔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 허지연이 품에서 몸을 떨자 심명준은 더는 서류를 볼 정신도 없었다. 결국 재산 문제라면 주면 그만이었다. 심명준은 마지막 장을 펼쳐 거칠게 사인했다. “자.” 심명준이 서류를 신유리 쪽으로 툭 던지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사모님 자리는 결국 네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어.”

© Webfic, All rights reserved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