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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선우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고 대답하기도 전에 배진우가 버럭 화를 냈다. 그는 손에 든 컵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고 다리에 묻은 하얀 액체가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버릇이 고쳐진 줄 알았더니 히든카드를 남겨뒀구나.” 목소리는 얼음장 같았고 눈빛에 경멸과 분노가 묻어났다. “똑똑히 들어. 난 애송이 따위에 관심이 없어. 더군다나 내가 키운 애한테? 짐승도 아니고 말이야. 설령 발가벗고 돌아다닌다고 해도 눈길 한번 안 줄 거야.” 말을 마치고 뒤돌아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쌀쌀맞은 뒷모습은 잔인할 만큼 무심했다. 선우연은 그대로 굳은 채 손가락으로 옷깃을 움켜쥐었다. 너무 세게 쥔 탓에 뼈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목구멍은 꽉 막힌 듯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얇은 벽 너머에서 희미한 신음이 들려왔다. “진우 씨, 살살해. 연이가 옆에 있잖아.” 배진우는 묵묵부답했다. 대신, 입술이 맞닿는 끈적한 소리가 점점 더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이내 김미정의 신음이 이어졌고 갈수록 대담해졌다. 침대가 삐걱대는 소리도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속으로는 뻔했다. 배진우는 그녀의 처지를 알려주려고 일부러 그런다는 것을. 물론 고통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미련 때문은 아니었다. 지옥 같았던 지난 3년, 사랑하는 감정은 진작에 소멸되었다. 그녀를 리베 아카데미에 데려다주던 날, 배진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선우연, 똑똑히 들어. 널 좋아하는 일은 영원히 없어.” 3년 뒤, 온갖 풍파 속에서 그녀는 감히 좋아할 엄두조차 못 냈다. 지금의 고통은 그 과거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매일 저녁 반복되던 소리. 타인은 물론 자신 것도 있었다. 그 기억은 이젠 악몽이 되어 그녀를 쫓아다녔다. 눈을 감아도, 귀를 막아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리베 아카데미가 있는 방향으로 연신 절을 했다. 이마가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다시는 배진우를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절대...” 마치 미친 사람처럼 갈라진 목소리로 연신 중얼거렸다. 이렇게 해야만 지독한 기억 속에서 해방이 될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선우연은 식탁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기계적으로 음식을 씹고 있었다. 배진우와 김미정이 2층에서 내려왔다. 그녀의 목에는 키스 마크가 가득했고 눈이 부시도록 환한 미소를 지었다. 선우연은 무관한 사람처럼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침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려는 순간 배진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기 서. 이마는 왜 다쳤어?” 선우연의 발걸음이 멈칫했고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실수로 부딪혔어요.” 말을 마치고 뒤돌아섰다. 그녀는 이미 마음을 굳혔다. 앞으로 남은 8일 동안만 버티고 영영 떠나기로. 배진우가 버럭 외쳤다. “어떻게 부딪혀야 이마가 그 모양이 될 수 있어?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거 아니야?” 이때, 김미정이 불쑥 끼어들었다. “진우 씨, 애한테 너무 그러지 마요.” 그리고 활짝 웃으며 선우연을 바라보았다. “연아, 오늘 진우 씨랑 예식장 보러 갈 건데 너도 같이 갈래?” 선우연이 거절하려는 찰나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정이랑 잘 지내라고 얘기한 지 하루 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 잊었어?” 선우연이 고개를 숙이고 나지막이 대답했다. “알았어요.” 여러 장소를 둘러본 끝에 김미정은 크루즈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배진우는 업무 전화를 받으러 선실로 걸어 들어갔다. 김미정과 선우연이 갑판에 서 있었다. 바닷바람이 불어오자 짠 내음과 습한 기운이 느껴졌다. 둘 사이에 적막이 흘렀다. 누군가와 같이 있는 자체가 불편한지라 선우연은 말없이 돌아섰다. 순간, 김미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아, 궁금한 게 있는데... 대체 얼마나 파렴치해야 자기 삼촌을 좋아할 수 있을까?” 선우연이 흠칫 놀라더니 난간을 꽉 움켜쥐었다. 김미정은 당황한 그녀를 보고 피식 웃었다.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해? 진우 씨가 한동안 애지중지 키웠던 아이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아카데미로 보냈다고 하더라. 궁금해서 조사해봤더니 어처구니가 없게 자신을 키워준 사람을 좋아할 줄이야.” 선우연의 안색이 창백했고 입술이 떨렸다. “그게...” 말을 마치기도 전에 김미정은 뒤돌아서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난 진우 씨를 오랫동안 좋아했어. 드디어 결혼 약속을 받아냈는데 이제 와서 망치는 꼴은 절대 못 봐. 게다가 결혼하고 나서 제3자가 끼어드는 건 더더욱 용납 못 하고. 내 말 이해했지?” 선우연은 눈을 질끈 감았고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떨렸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전 이미 떠나기로 마음먹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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