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선우연의 등은 끔찍한 흉터들로 가득했다. 방금 생긴 상처를 제외하고 대부분 오래된 듯 보였고, 뒤엉킨 자국은 마치 그간의 고통이 고스란히 피부에 새겨진 듯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 하나 없었고, 지난날의 고통을 증명해주는 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배진우의 손에서 채찍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느새 안색은 새하얗게 질렸고, 눈빛엔 충격과 혼란이 뒤섞여 있었다.
등을 향해 뻗은 손가락이 떨려왔지만 감히 닿을 수 없었다. 혹시나 더 아프게 할까 봐.
“뭐야? 등이 왜 이래?”
갈라진 목소리는 분노와 안쓰러움이 묻어났다.
선우연은 고개를 숙이고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발견한 건가? 리베 아카데미가 사실은 지옥이라는 걸.
하지만 이미 늦었다.
예전의 밝고 활기찬 소녀는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녀가 입을 열려던 순간 등 뒤로 김미정의 목소리가 들렸고, 나긋한 말투로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연아, 널 기꺼이 용서했더니 이런 식으로 진우 씨를 속이면 어떡해?”
배진우의 안색이 돌변하면서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다 가짜라고?”
김미정이 피식 웃으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당연하지. 연이가 지난 3년 동안 리베 아카데미에 다녔다며? 성북시에서 제일 엄격한 학교잖아. 기숙사 생활하면서 다칠 일이 뭐 있겠어? 절대 속으면 안 돼.”
배진우는 그제야 한시름 놓았고 곧이어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차올랐다.
이내 채찍을 바닥에 내던지며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넌 정말 구제 불능이구나. 오늘 하루 굶어!”
선우연은 고개만 끄덕일 뿐 표정 변화가 없었다.
리베 아카데미에서 굶는 건 그녀에게 일상이었다.
가끔 배가 너무 고프면 강아지의 밥을 뺏어 먹기도 했다.
그러고는 나지막이 대답했다.
“네.”
말을 마치고 뒤돌아서 방으로 들어갔다. 가냘픈 뒷모습은 고집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수년간 그녀를 돌봐온 가정부 이금자가 약을 들고 들어왔다.
선우연의 등에 난 상처를 보자 눈에는 금세 눈물이 고였다.
“아가씨, 왜 설명을 안 하신 거예요? 이게 어딜 봐서 가짜 상처예요? 학교에서 공부하신 거 아니에요? 어쩌다 이렇게까지 다치셨어요? 왜 도련님께 말씀드리지 않아요? 누구보다 아가씨를 아끼시는 분인데 사정을 알게 되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
선우연은 고개를 숙이고 텅 빈 눈으로 바닥만 바라봤다.
이금자의 말은 마치 비수처럼 그녀의 심장에 박혔다.
과연 가슴 아파할까? 예전이라면 그랬을지 모른다.
배진우는 한때 그녀를 보물처럼 아꼈다. 연애편지를 건네준 남자가 자기랑 사귀면 스포츠카를 태워주겠다고 했을 때 수십억이 넘는 슈퍼카를 여러 대 사서 선물하며 애정 어린 말투로 말했다.
“우리 공주님한테 저딴 남자는 어림도 없지.”
그녀가 열이 났을 때 해외에 있으면서도 중요한 회의까지 내팽개치고 무려 열 몇 시간씩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밤새 곁을 지키며 간호했다.
생리통에 시달릴 때는 직접 약을 챙겨주며 부드럽게 달래주었다.
“괜찮아. 이거 마시면 안 아플 거야.”
선우연의 눈가에 눈물이 서서히 맺혔다. 이내 눈을 살포시 감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머니, 저 피곤해요. 이만 쉬고 싶어요.”
이금자는 눈물을 훔치더니 조심스럽게 이불을 덮어주며 울먹거렸다.
“그럼 편히 쉬세요.”
선우연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천천히 몸을 누였다. 눈물이 눈가를 타고 흘러내려 베개를 적셨다.
그리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과거로 돌아갔다.
배진우의 손을 잡고 놀이공원에 가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함께 회전목마를 탔다.
다정하면서 애정이 묻어난 웃음은 그녀만을 위한 듯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멀어져 버렸다.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