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방 안에서 온종일 쉬었지만 채찍을 얻어맞은 등은 여전히 욱신거렸다.
하지만 이런 고통쯤은 이미 익숙했다.
이때, 방문이 슬며시 열리더니 김미정이 화려한 드레스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연아, 오늘 진우 씨 생일이야. 생일 파티를 준비했으니까 너도 같이 가자.”
선우연은 고개를 저었다.
“전 됐어요. 두 분이 다녀와요.”
김미정의 얼굴이 살짝 굳어지더니 은근히 압박했다.
“좋은 말 할 때 듣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선우연의 몸이 흠칫하더니 눈빛이 서서히 생기를 잃어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힘에 조종당하는 듯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드레스를 받아 들고 갈아입으러 갔다.
김미정은 저벅저벅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녀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이 말만 하면 선우연은 주문에라도 걸린 것처럼 아무런 반항 없이 순순히 따랐다.
혹시 리베 아카데미에서 생긴 습관일까?
분명 도덕을 가르치는 곳일 텐데 어쩌다 이런 식으로 교육하게 된 거지?
한창 머리를 굴리던 와중에 선우연이 드레스를 갈아입고 나왔다.
김미정은 위아래로 훑어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연회가 곧 시작될 거야.”
연회장 안은 휘황찬란한 조명이 빛났고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선우연은 김미정의 뒤를 따라 고개를 푹 숙인 채 걸었다. 마치 생기 하나 없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그녀가 등장하자마자 주변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저 아이가 배 대표님이 그렇게 애지중지한다는 여자인가요? 비쩍 말라 생기라고는 찾아보기 힘드네요.”
“그러니까요. 아들 녀석이 한때 짝사랑까지 했대요. 학교에서 제일 예쁘다며 뭇 남학생의 마음을 다 훔쳤다네요. 지금은 마치 꼭두각시 같지 않아요?”
“배 대표님 약혼녀랑 나란히 있으니까 더 비교되는군.”
“김미정 씨와 배 대표님이야말로 천생연분이죠. 너무 잘 어울리네요.”
선우연은 사람들의 얘기를 귓등으로 듣고 묵묵히 김미정의 뒤를 따랐다.
김미정이 미소를 지으며 배진우의 곁으로 다가가 팔짱을 끼었다. 그러고는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우 씨, 다들 우리가 완벽한 한 쌍이라고 하네.”
배진우는 싱긋 웃더니 다정하게 맞장구를 쳤다.
“사실이잖아.”
선물을 건네줄 때 김미정은 정성껏 포장한 상자를 꺼내며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진우 씨는 부족한 게 없잖아? 그래서 이번에 임신 계획표를 준비했어. 결혼하고 나서 1남 1녀를 가질 생각인데, 어때?”
배진우는 어리둥절하다가 무의식적으로 옆에 있는 선우연을 힐끗 바라보았다. 곧바로 시선을 거두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미정이가 좋다면 나도 좋아. 뭐든 미정이 말대로 할게.”
김미정은 그의 품에 안긴 채 고개를 돌려 선우연을 바라보았다.
“연아, 넌 무슨 선물 준비했어?”
선우연은 눈을 내리깔고 가방에서 선물 상자를 꺼내 배진우에게 건넸다.
뚜껑을 열어보니 안에는 수정같이 맑은 옥팔찌가 들어 있었다.
김미정은 힐끗 보고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옥팔찌였어? 진우 씨가 팔찌를 찰 리가 있나? 선물치고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니야?”
선우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고개를 들어 배진우를 바라보았다.
역시나 예상대로 충격받은 기색이 역력했다.
팔찌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둘뿐이었다. 바로 배씨 가문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가보로서 미래의 안주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그때 선우연이 애교를 부리며 조르고 졸라 겨우 받아냈었다. 배진우는 그녀가 어린 마음에 예뻐서 갖고 싶어 하는 줄로만 알고 귀여워서 그냥 줬다.
그런데 지금 다시 돌려받을 줄이야.
선우연은 나지막이 말했다.
“아저씨, 행복하세요.”
배진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내 입을 열려던 순간 갑자기 비명이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연회장 중앙에 매달린 샹들리에가 곧 추락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바로 아래에는 선우연이 서 있었다.